13절에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고 말씀한다. 40년 전 쯤 아마도 최초의 크리스천 락 가수였던 Keith Green은 많은 곡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의 제목이 ‘So you wanna go back to Egypt?’ 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지만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에 비해 생활이 안정됐던 때를 그리워 하는 내용이다. 더우기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에 대한 개념도 없었기에 마음대로 살 수 있었다.
계속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해 음행의 문제로 경고했고 이는 우상 숭배 즉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으로 하나님 삼는 것, 다른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들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는 것에 있었다.
11절은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하는데, 죄의 문제에서 오는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편하게 여기 저기 제단을 많이 만들어서 속죄제를 바칠 수 있게 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편리함이 범죄를 용이하게 했다. 아무런 거림낌 없이 죄를 짓고 단지 속죄제를 바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죄사하심 역시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육체의 기회를 삼’을 수 있게 한다 (갈 5:13).
엄밀히 말해서 ‘세상 죄’를 지고 주님은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는다기 보다는, 그러한 주님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죄 가운데 죽는다. 그래서 요 16:9에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한다. 주님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 (롬 6:10)’ 이므로 죄의 문제는 이제 모두 해결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짓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인하기 때문에 선악간에 그 모든 하는 것들이 인정되지 않는 죄 (하마르티아) 뿐인 삶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과 율법의 의, 혹은 양심을 통해, 그리고 성령님의 말씀하심으로 죄나 허물이 드러나진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더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말씀하고,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 죄를 자백하면.. 깨끗하게 하실 것 (요일 1:9)’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면 ‘지금 죄를 짓고 나중에 자백하지 뭐’ 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 마치 죄를 짓기 위해 제단을 많이 만드는 것과 같다.
죄의 문제가 단지 ‘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여 sin against God’ 짓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죄도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갈 3:3은 경고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주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함을 압니다 (히 11:6).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가 되지 않도록 오직 주님을 나의 위로 삼게 하소서. 모든 보상 심리에서 해방시켜 주소서. 결국 저는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홀로 높임 받으실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