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라고 기록하는데, 오늘 말씀 2절에도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이라고 말씀한다.  왜 하나님은 ‘직접’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능력을 보여주시지 않고 마치 숨어 계시는 것 처럼 몇 명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셨을까?  직접 나타나셔서 그 영광을 보여주신다면 모두 믿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가 그 분을 직접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는 신이라면 우리와 차원이 그리 다르지 않은 만만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우리보다 차원이 높으신 하나님은 그 속성 자체가 보이지 않는 분이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하나님은 마치 ‘키다리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고, ‘뒷 모습’만 잠간 봤지만 머리 속에 각인 되었고,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우다 보니 이제까지 나를 후원해 주신, 나를 그 은혜로 인도해오신 분이고, 이제 곧 나에게 청혼을 하실 분이시다. (, 마이!)

 

성경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믿음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구절이 많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는 마가복음 16:11 처럼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구절도 있다.  고후 4:18에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증거하고 히 11:1은 믿음에 대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간혹 신앙 생활을 하며 방황할 때가 있는데, 마치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는  5절 말씀처럼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기억은 있기에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현실에서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픈 딜레마를 보여주는 듯 하다.  주님이 계시는 것 같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옆의 우상은 바로 볼 수도 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우상을 따르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자니 힘들고 어렵고 귀찮다… 하지만 이럴 때 더 믿음을 사용하고 훈련하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라고 외쳐야 한다.  

 

8절 후반에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고 말씀하는데, 이게 우리를 향하신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부모들이 가끔 자녀들을 윽박지르고 혼내고 하는 이유가 자녀들이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은 지혜롭게 해야하고, 감정이 상해서 좌절하게 하면 안되겠지만).  ‘긍휼’로 번역된 단어 ‘니ㅎㅋ움 (혹은 니ㅎㅋ우밈)’은 ‘긍휼, 자비, 위로’ 등의 뜻이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향해 불붙듯 하시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마치 키다리 아저씨 처럼 나타나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셨지만, 이제 은혜 시대에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셨고, 또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우리가 돌이키기만 하면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자처럼 소리 내소서.  모든 열방이 듣고 주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떨도록 주님 포효하소서.  오늘 포효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나의 위안삼고 주님의 능력과 사랑의 음성 안에서 주를 경외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