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결혼 생활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성화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 단계씩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는 기쁨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아는 것 자체가 행복임을 말씀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먼저 1절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씀하는데, 점진적인 행동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각 상황에 따라 취해지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시작은 우선 ‘꾀’ 즉 생각에 있다.  악인들이 잘 되는 것 같아 보여서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따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러한 것을 거부하는 것이 행복임을 말씀한다.  세상에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돈 쾌락 권력 등에 대해 생각이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행복이다.

 

둘째로 위의 것이 가능하려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율법’이란 ‘기준’이다.  즉 세상적인 방법이나 가치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준을 두는 것이 행복이다. 

 

셋째로 3절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하는데, 1-2절의 결과인 것과 동시에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됨을 의미하고 그 말씀의 생명과 힘으로부터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하는 일은 모두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위한 것이 되기 때문에 ‘형통 (번영)’일 수 밖에 없다.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8복을 말씀하시는데, 이 역시 ‘행복한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미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하게 하며 의를 위하여 박해 받은 자는 행복하다고 말씀한다.  세상적으로 보면 전혀 행복한 조건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은 광고에 나오는 것 처럼 편안한 삶을 살면서 미소지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실 허구이고 허상에 가깝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4절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라고 하지만 현실은 특히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삶에서 무언가를 대단한 것들을 이루는 등 ‘잘사는’ 것 같다.  하지만 5절은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함을 분명히 한다.  결국은 ‘여호와의 인정’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 행복이 가치관의 문제임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임재 안에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 주님께서 저를 이미 행복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저의 하는 모든 것에 주님과 동행한다면 형통이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 안에서 이미 행복한 사람인 것을 알고 누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