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이 ‘행복한 사람은’ 이라고 시작한 것 처럼 2편 역시 ‘행복하다 (아쉬레~)’로 끝난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진정 여호와 하나님,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기 원하고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부러 잊으려 한다 (벧후 3:5).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어렴풋이라도 알기에 거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한다 (3절).
이러한 열방을 주님께서는 능력으로 깨뜨리시고 부수시지만 (9절), 동시에 살길을 보여 주신다.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셨고 (6절), 친히 낳으신 아들이 있으심을 보여주신다 (7절). 이 아들과 왕은 시편 기자인 다윗을 의미할 수는 없다. 다윗은 시편을 통해 여러 차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방이 구원을 얻는 길은 바로 그 친히 낳으신 아들, 즉 만유의 소유주가 되신 (8절)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떪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목적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누리는 것’이다.
열방은 주님을 외면하고 그 복된 길과 관계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살려고 하다가 결국은 망하지만, 주를 경외함으로 그 아들에 입맞추고 그를 신뢰하는 (‘피하는’의 원어) 이들은 행복하다.
나셰꾸~ 바~르! 주님, 주께 나아와 입맞춥니다. 이 입맞춤은 거룩한 입맞춤이고 영광스러운 입맞춤입니다. 결속의 표현이고 경외의 찬사입니다. 주님은 열방 가운데 높임을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오늘 주님을 누리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합니다. 주의 임재 안에서 주께 입맞춥니다!
자아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살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가 사시지 않는다면 자아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 내 안으로부터 담대함과 명확함, 그리고 겸손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