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잊는 것은 시편은 시라는 것이다. 오늘 시편 4편도 처음에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라고 밝힌다. 히브리어 시는 운율이나 라임이 없지만 문장이 서로 화답하거나 대조 혹은 비교 혹은 반복 등을 통해 시라는 것을 눈치채게 한다. 우리 말 시 역시 노래로 만들면 운율은 있을지라도 라임을 만들기는 힘든데, 히브리어 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오늘 시편 4편을 히브리어로 들어보면 전혀 시같이 들리지 않는다. 3편에 세 번 나왔던 ‘셀라’도 다시 두 번 나오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낭독할 때는 그냥 ‘셀라’로 읽을 뿐이다. 느낌으로는 ‘간주’ 정도의 의미 같지만 이것 역시 분명하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구약에 ‘여호와’ 혹은 ‘야훼’를 뜻하는 단어는 יְ הוָה로 기록했지만 그냥 ‘아도나이 (주)’로 읽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시편 23편이 여러 노래로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게 시편 4편을 노래로 만든 것은 그리 많지 않은데, 31년 전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엘에이에 청소년 선교단체인 ‘가데스 미션’ 이라는 곳에 잠간 나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자체 제작한 찬양 테이프를 받아서 들었는데 그 중에 시편 4편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우울하고 깊은 시름으로 주를 부르는 느낌의 찬양이다. 시편 4편을 읽을 때면 그 찬양이 생각난다.
그 찬양의 후렴 부분을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로 만들어서 몇 번 반복한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신앙 생활에서 가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고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우리의 형편이나 상황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다윗 역시 그의 여러 시에서 그렇게 고백하고 있지만 그럴 때 의지를 사용해서 계속 주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른다.
이 시편 4편을 노래로 만들면 분위기를 어둡게 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밝게 하는 것이 나을까? 다윗의 원곡을 들을 수는 없지만 ‘현악’으로 한 것으로 보아 웅장한 느낌 보다는 부드럽고 밝을 것 같다. 아마도 처음은 조금 우울하게 시작해도 마무리는 ‘기쁨’과 여호와를 인정함으로 맺기 때문에 밝게 끝날 것 같다. 우리의 상황도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을 부를 때 넉넉히 이긴다.
주님, 주님의 이름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아니라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시는 영원히 살아계신 이름, 내가 기도할 때 들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의, 나의 기준으로 고백하며, 우리에게 선을 보이실 분은 여호와이심을 선포합니다. 내가 부를 때에 주께서 들으시며 응답하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