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7편은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고 표기되어 있다.  즉 다윗이 직접 영감을 받아 지은 시라기 보다는 아마도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하나님을 향한 ‘나만의 노래’가 있는 것은 복된 것이지만 그것이 꼭 ‘창작’일 필요는 없다.  믿음의 선진 혹은 형제들의 노래를 믿음으로 받아 나의 것으로 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왕국은 풍요하고 부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8절에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 (혹은 심판) 하소서’ 라고 고백하는데, 앞의 구절도 그렇지만 다윗은 자신의 행위가 올바르고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심판해 달라고 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주님 앞에 온전하고 의로운 자가 있을까?  사실 다윗은 같은 시편 143:2 에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고, 시편 여러 곳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한다 ( 51:3, 69:5 ).

 

성경 여러 곳에서도 특히 심판 날에 그 누구도 주 앞에 능히 설 수 없음을 말씀하는데, 3:2에는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계시록 6:17에는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모든 행위대로 심판하기를 구하지 않고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자신을 심판해 주시라고 구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의롭지도 성실하지도 않아서 주 앞에 보여 드릴 것이 없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직접 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로 체험되신 후에는 심판 날에 우리가 행한 ‘선악간에’ 심판받는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고후 5:10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또 계시록 22:12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생명책에 기록되어진 사람은 불못에 떨어지는 ‘둘째 사망’에는 참예하지 않지만, 죽기 직전에 주님을 영접하고 죽은 이들과 평생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좇은 사람들에 대해 그 상이 동일할 수는 없다. 

 

11절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기록하는데 하나님의 분노하심에 우리 역시 같은 의를 따라 분노해야 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는데 별 반응이 없고, 하나님께서 측은히 여기시고 마음 아파 하시는데 그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정세를 보면 과연 사람들의 분노가 하나님의 분노를 따라 분노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  하나님의 분노를 따라 분노하면 먼저 자신이 회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따라 사심이나 선동없이 냉철하게 현실을 비판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동 혹은 전쟁밖에는 없고 그 역시 결과적으로 의를 이루지 못한다.

 

박근혜가 대선에 나왔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의아해했다.  평생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이 아버지 보호 밑에서 살던 이가 정치에 대해 무슨 준비를 했을까?  자신은 소위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하던 아무개 대통령 역시 많은 실망을 남겼었다.  결국 그 주위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이용해 먹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런데 반이 넘는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국민들이 투표해서 당선된 후에 사람들은 밝혀지는 일에 대해 분노한다.  결과적으로 국민들 실수 아닌가?  더우기 기독교 역시 분노하는데, 이럴 때 일수록 ‘기도하자’는 측과 ‘데모하자’는 측으로 갈린다.  하지만 주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자’ 라는 교회는 찾기 힘들다...

 

그래서 12-13절은 섬뜩하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마치 무기들과 미사일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 같다. ㅠㅠ  히브리어 ‘회개하다’는 ‘슈브’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 ‘메타노이아’로 번역되었다.  헬라어는 단지 ‘생각을 바꾸다’로 번역될 수 있지만, 슈브는 ‘돌이키다’ 특히 하나님 앞으로 즉 절대적 기준 앞으로 온전히 돌이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대적 회개가 주님의 교회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  금식을 선포하고 먼저 회개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되어야 한다.

 

주님, 한국에는 많은 주님의 신실한 믿음의 권속들이 지금도 무릎꿇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음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주님의 왕국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처럼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우리 안의 높은 곳을 내어드리고, 기독교의 높은 곳을 이제 주님께 내어 드리고, 높아진 것은 낮아지고 낮아진 것은 높아지게 하소서.  주의 오심이 예비되게 하소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베냐민인 구시의 말'이 다윗을 대적하던 말이라고 하네요. 영감 보다는 '반응' 혹은 '거룩한 분노'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