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에는 감사와 찬송, 여호와의 이름, 이방, 심판 등의 단어가 자주 눈에 띤다.  특히 고통 중에도 (13) 감사와 찬송으로 주께 소망을 두는 다윗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방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데 (17), 개인적으로 특히 눈에 띠는 단어는 가난 (12, 18)’, ‘궁핍 (18)’ 등의 단어다.

12절의 가난은 원어로는 겸손이고 18절은 그대로 궁핍가난이다.  이제 미국 대선이 끝났고 공화당의 트럼트가 당선됐는데, 미국의 공화-민주 혹은 민주-공화로 돌아가며 정권이 바뀌는 것이 재미있다.  이번 선거에 대해 말들이 많았지만 선거 결과 보다는 보수로 이해되는 공화당과 진보를 표방하는 민주당의 전통이 재미있다.  이들의 정책 방향 역시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소수민족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민주당이 더 나은 정책을 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많은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당이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많은 지원 정책을 펴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이로 인해 가난한 이들은 아예 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즉 그들의 상황은 그리 풍족하지 않지만 마음은 오히려 교만하고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불노소득을 바라는 것은 비단 대기업 화이트칼라 회장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해서 여러 사회 보장 혜택을 누리는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엄밀하게 말해 이들은 가난한 이들이 아니다.  물론 문제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에 있다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돈이 많은 부자나 벌이가 없는 가난한 이들이나 인생의 핵심은 물질의 유무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이고 다윗은 이것을 이해했다.  다윗은 무조건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일 수 있지만, 20절에 이방으로 자신이 인생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렇지 않음을 확인해준다.

인생사람이라는 단어가 원래는 아담이겠지만 여기는 에노쉬라는 단어가 쓰였다.  아나쉬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죽을 수 밖에 없는 (mortal)’ 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인데, 재미있게도 창세기 4:26절에 나온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기록하는데, 아담이 셋을 낳고 후에 셋이 낳은 아들에게 에노스 (에노쉬)’ 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이 삼대를 지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을 떠난 삶이 의미없고 부서지기 쉽고 연약하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이것은 오늘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고백과 일맥상통 한다.

주님, 에노스라는 모습이지만 주의 강하신 이름을 의지합니다.  주를 앙망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위로를 얻을 것이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본질과 핵심인 주님 자신을 추구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높여지는 하루 되게 하소서.  에노스가 예수로 옷입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