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서 갑자기 요엘서로 넘어왔다. 3장으로 끝나는 비교적 짧은 책이고 유다에 대한 예언이지만 그 내용은 특히 요즘 상황에 대한 조명과 이러한 때를 지나는 믿는 이들에 대한 권고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소망을 말씀하는 것 같다.

메뚜기 재앙은 출애굽기에도 등장하지만,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이 없는 철저한 재앙이었다. 재미있게 4절에는 네 가지 종류의 메뚜기 즉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 등을 열거하는데, 이들은 종류가 조금씩 다를 뿐, 모두 작물을 해쳐서 백성들의 소망을 끊는 것은 다르지 않다.

요즘 미국은 백인과 소위 '유색인종'간의 갈등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 같은 상황이고 (물론 항상 있어왔지만), 특히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종간의 갈등이 부추겨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져 가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4 종류의 메뚜기 떼 처럼 인종갈등, 경제 문제, 정치 및 사회 문제 그리고 가치관 혼란 등은 백성들이 참된 것을 소망하는 것을 방해한다.

한국은 한국대로 대통령 자질 문제며 배후 문제 등 정치적 혼란에 대한 좌우익 갈등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의 도덕적 타락, 재벌들의 횡포, 언론들의 무책임성, 북의 위협, 그리고 힘들어져만 간다는 중산층 등 모든 문제들이 마치 4 종류의 메뚜기 같아 보인다.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모두 다른 종류의 메뚜기 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여기에 휩쓸려 '하야 촉구' '촛불 대회' 등에 열을 올리는 적지 않은 교회들은 이러한 메뚜기 떼에 휘말려 자신들도 메뚜기 떼 같이 되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책임이 있고 정치적으로도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고 한 말씀을 하신다면 왜 각자 따르는 것이 다른가? (생각해 보면 요엘 당시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먼저 '제사장들'이 금식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14).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언제 금식을 선포하는가? 소위 '교회 성장'이나 '축복' 혹은 '건강 문제' 등을 위할 때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참으로 금식을 선포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거나 행동을 취하기 전 먼저 금식함이 필요하다.

어제는 미국 추수감사절이었고 다음 달에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신년 등 먹을 것이 다른 계절보다 많은 때다. 한 상 푸짐히 차려놓고 가족 그리고 확장된 가족인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감사를 드리지만, 원래 식탐이 없기도 하고 비교적 소식을 하는 나로서는 음식에 대해 그리 큰 감동은 없다. 아마도 이 땅을 살아가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 역시 상황에 따라 금식이 어려울 수 있어도 그 마음에 금식보다 더한 고통과 갈등이 있을 수도 있겠다.

주님,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 하늘 왕국의 백성들로서 좌익이나 우익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메뚜기 재앙이나 그 외 여러 재앙들이 임한다 해도 주님 붙들게 하시고 형제 자매들이 하나됨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소서.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상기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