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서는 성취된 예언일까? 3장을 자세히 읽다보면 아직은 성취되지 않은 예언 같다. 내일 분 17절은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아직은 예루살렘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3장에서는 그를 대적하던 원수들에 대한 심판 역시 잊지 않으신다. 주님의 역사하심은 치밀하시고 주도면밀 하시다.
4절의 두로 시돈 블레셋 등을 종족으로 이해하여 해석한다면 지금은 자취를 찾기 힘들어서 해석이 힘들게 된다. 성취되지 않은 예언으로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라면 ‘칼’ 혹은 ‘창’이라고 한 부분은 문자적 해석보다는 은유적 해석이 더 낫다. 계시록 많은 부분 역시 이러한 문제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아마도 세대주의 (혹은 경륜주의, dispensationalism) 와 개혁주의의 의견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의견 차이는 결국 인간의 개인주의적 구원 관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이기에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특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얻는 지금의 입장과 기준에서 보면, 이방에게 팔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2, 3, 6절) 2차 대전 때 죽임을 당했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역사를 통해 주를 믿는 많은 이들이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문제하며, 더우기 하나님을 결코 믿을 수 없는 환경만 주어졌다고 보이는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 구원 혹은 한 영혼의 소중함은 길 잃은 어린양 처럼 분명 그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단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만일 온 역사에 당신 한 사람만 있고, 죄를 지어 죽게 되었어도 주님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을 거라 말하지만, 그것은 우선 사실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주님은 많은 아들 (히 2:10)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 구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한 관념에서 조차 구원받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왕국'의 관점으로서의 구원은 이러한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위정자의 범법함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그에 대항해 시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을 통해 좀 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도록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촛불 집회에 나가더라도 그 이유와 목적은 다른 이들과는 달라야 한다. 특히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것은 결코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행복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만, 그것이 방종으로 간다면 법적으로 조치가 취해진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것에 있어 개인의 행복 추구가 목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다.
주님, 주의 구원하심은 우리의 고백이 먼저가 아니라 주의 영이 먼저 역사하시고, 오직 주께서 하시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의 나라로 서게 하시고, 주를 왕으로 모시는 왕국으로, 또 주의 몸된 교회로 건축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