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편이다. 그리고 벌써 12월이다. 올해를 뒤 돌아보니 여러 up and down이 있었고, 다시 아쉬움만 남는다.
지난 시편 21편은 기쁨과 즐거움과 찬송을 노래했고, 다음 23편은 너무도 유명한 시편인데, 그 가운데 이렇게 우울한 22편이 등장한다. 시편이 어떻게 편집됐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순서대로 읽으면 다윗이 조울증 걸린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 같다. 주님을 믿는다고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좋을 수만도 없다. 사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환경을 초월해서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기쁨의 태도로 살라는 말씀이다.
눅 24:44은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라고 기록하는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는 물론 시편에서도 주님에 대한 예언이 있음을 말씀한다. 그래서 이 1절은 주님께서 죽으실 때 인용된다.
다윗은 이제까지의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이제 자신의 어려운 환경과 상황을 토로해 내면서 1절에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탄식한다. 주님께서도 보통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죽으실 때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엘’ 즉 ‘신’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어떤 것을 초월한 비밀스러운 절대자 혹은 창조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관계적인 면에서는 그리 가깝지 않은 단어다. 철저히 버림 받아야 할 때는 이렇게 호칭도 달라진다. 나는 올해 얼마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 얼마나 ‘아버지’라고 불렀을까? 얼마나 ‘주 예수님’을 불렀을까? 아니면 얼마나 아예 부르지도 않았을까..
삶 속에서 굴곡을 경험할 때 어떻게 주님을 앙망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나의 삶 전체가 주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시인함으로 가능하다. 다윗은 9-10절에서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라고 고백하며 구덩이에 빠진 자신의 상황 속에서도 온전하신 주의 섭리와 주권을 고백한다.
주님,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가끔 멀리 계시는 하나님 같다는 느낌도 엄습하지만,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삶의 굴곡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풍성함으로 변화 되게 하시고, 모든 것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