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은 찬양과 감사에 대한 내용도 많지만 오히려 고뇌와 갈등, 그리고 이에 대해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이 아마도 더 많은 것 같다.  시편 기자 중 특히 다윗의 삶에 많은 고통 있었지만, 오늘 말씀에는 그러한 면을 더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읽는 관점과 독자의 성향에 따라 이해가 다를 수 있지만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지만) 1절부터 계속해서 선포하는 내용은 뒤집어 읽으면 그의 마음 속의 고뇌와 상처 그리고 불안함에 대해 여호와께 아뢰고 그를 의지하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주께 나아가기 위해 의지를 짜내는 모습 같아 보인다.

 

어쩌면 그의 오랜 방랑 생활과 목숨을 위협 받았던 많은 순간들 가운데 그는 이렇게 선포함으로 자신에게 위안을 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것은 다윗의 이러한 선포들을 ‘뒤집어’ 이해하고, 그 속을 들여다 보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기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는 이유는 10절에 있는 그의 고백 때문이다.  개정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이다’ 라고 번역했는데, 원본에서는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나를 버릴 때에 여호와는 나를 들어올리실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즉 부모가 다윗을 정말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문구다. 

 

생각해 보면 성경에 다윗의 부모가 그를 버렸다는 내용은 정확히 보지 못한 것 같다.  단지 사무엘이 사울 다음으로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에게 아들들을 부르라고 했을 때 이새는 다윗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잊었던 것 정도다.  또 다윗이 블레셋에 대항해 형들처럼 나가 싸우겠다고 말했을 때 이새가 화를 내며 ‘너는 안된다’ 즉 무시당했던 것 등이 생각난다.  정확한 이유와 형편은 모르겠지만 다윗에게 이러한 일들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을 수 있다.  특히  적어도 십대 정도로 나이가 좀 들어서 이러한 취급을 받았으니 아마도 어릴 때 부터 그는 집안에서 ‘왕따’였는지 모르겠다.  부모에게서 무시 당하고 버림 받는 다는 것은 아마도 자식으로서 가장 큰 상처고 트라우마가 될 것인데, 다윗은 하필이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심리학적인 관점으로는 다윗의 이러한 왕따 체험과 어릴적 상처 때문에 ‘종교’를 도피처로 삼았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는 바라는 단 한 가지를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 (4)’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쩔 수 없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모두 다 잊고 그냥 속편하게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성전에 거하는 것, 즉 속된 말로 ‘속세를 떠나 머리 깎고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님을 다시 그의 고백에서 볼 수 있는데, 어려운 환경에 대한 도피처 정도로만 여호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자체, 그 분의 참 하나님 되심을 인해 그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았던 것을 깨달을 수 있다.  27편은 앞 부분 그의 상황에 대한 탄식을 눈치챌 수 있지만 그 후에는 그 보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왕의 위치에 있었지만 다윗에게 여호와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주님, 환난날이 언제이든지 내가 주께서 베푸신 은밀한 곳에 숨게 하소서.  그 은밀한 숨는 그 곳은 내게 바위가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반석이십니다.  살아오며 상처 받고 왕따 취급을 당했던 많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를 의지함으로 그러한 상처들은 그리스도를 더욱 부유하게 누릴 수 있는 자원이 되게 하소서.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참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오늘 성령으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