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 길, 나의 운전은 좀 험악(?)했다.  그리 급한 일도 없는데 차선을 바꿔가며 다른 차들보다 더 빨리 가야했다.  마음 속에 주님께서 ‘내가 옆에 함께 타고 있어도 이렇게 운전하겠니?’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운전 중에는 확실히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각 절 마다 ‘여호와’ 혹은 ‘여호와의 소리’를 계속 언급한다.  그리고 여호와와 여호와의 소리는 주위 모든 것을 둘러 충만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무소부재하신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오늘 생명의 삶 제목 처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져온다.  10:4은 ‘…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라고 말씀하는데, 신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다.  즉 주와 동행하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한 인물로는 에녹을 빼놓을 수 없다.  에녹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주님과 동행한 인물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5:24) 는 놀라운 기록을 한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을까?  더우기 그 때에는 낙원 때 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던 때다.  그리고 에녹은 ‘여호와’와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했다.  즉 ‘관계적인 하나님’인 여호와가 아니라, ‘일반적인’ ‘신격’과 동행했다.  생각해 보면 에녹은 그의 삶 일상에서 ‘신격’ 즉 ''을 추구하고 또 인정하며 그의 생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연습했던 것 같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고 단지 영적인 것들 혹은 비교적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만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에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견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에서 주님께 아뢴다는 것은 아침에 어떤 색상의 옷을 입을까 혹은 어떤 넥타이를 맬까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주님께 여쭤본다는 것인데, 전자의 견해를 가진 이들은 이에 대해 쓸데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러한 사소한 것들은 하나님의 관심 밖이고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긴 문제라고 생각하며, 또 한면으로 우스꽝 스러운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침에 조심 스럽게 운전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은 ‘운전’이라는 사소한 것에 대해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것이 된다.  사실 사소한 것에서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서도 주님과 동행하기가 쉽지 않다.  동행의 문제는 가치관의 문제인 동시에 습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치관이나 습관은 ‘생각’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신자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마치 일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것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데, 사실 그러한 면이 분명히 없지는 않다.  하지만 단지 세상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과 다른 것이 있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 안에서 말씀하시고, 오늘 말씀 처럼 ‘우렛소리, 백향목이 꺽임, 뛰는 들 송아지 같은 모습, 화염, 진동하는 광야, 홍수’ 등등 주위 환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래서 비신자들이 아침에 옷을 고를 때나 넥타이를 고를 때는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혹은 그 날 기분에 맞추거나 비지니스 거래을 위해, 혹은 그날 날씨에 적당한 것을 고르겠지만, 믿는 이들은 주님께 물어보며 주님의 생각을 구할 때, 너무 튀는 것을 고르거나 함으로 자신이 돋보이게 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한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물론 이러한 사소한 것은 주님과 동행하려고 노력하지만 반대로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또 마음대로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주님과의 동행은 그래서 일상 모든 것에서 적용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자가 되고 (2), 주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11).

 

주님,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일상에서 얼마나 될려는지요..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는 커녕 주님의 달콤한 음성을 들어도 따르지 않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니,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구원은 주님과의 관계임을 압니다.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기 원합니다.  변화받기 원합니다.  시시각각 주님을 인정하며 주님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