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한다. 사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마도 상식적(?)인 것이겠다. 그런데 오늘 이 상식을 뛰어 넘은 사람을 본다. 바로 다윗인데, 34편 시작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다윗은 쫓겨난 후에도 시를 쓰는 진정 시인이다.
나같으면 목숨을 건진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겠지만 시까지 쓸 생각은 못할 것 같다. 오히려 ‘하나님, 이게 챙피하게 뭡니까? 목숨 건지려고 미친 체까지 하고.. 왕의 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저 왕 맞습니까?’ 하며 원망도 하고 의기소침해 질 것 같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고 자신을 건지시고 (4절) 구원하신 (6절)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 어떤 상대적인 감사가 아니라, 절대적 기준의 감사다.
생각해 보면 감사를 가로막는 것은 아마도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에서 오는 것 같다. 같은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남들은 더 잘 사는 것 같아 보인다. 물질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또 여러 기준을 보아도 나보다 나아 보인다. 그러니 감사가 줄어든다…
하지만 절대적인 감사는, 오늘 나에게 크레딧카드 빚이 10만불 있다 해도, 관계적으로 정말 어렵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있어도, 직장에서 쫓겨나도, 어떤 이유에서든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어도, 내 목숨은 아직 붙어있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이미 주신 구원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상대적인 비교를 초월해서 절대적인 기준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한다. 찬양은 나의 상황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인 나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 (10절).
1절은 ‘항상 찬양’이라는 말이 두번이나 나온다. 영 번역에서는 ‘at all times’ 그리고 ‘continually’로 되어있다. 즉 찬양과 송축은 항상 그리고 계속해야 함을 말씀한다. 그런데 3절에는 ‘함께’ 라는 단어가 또 두번 나온다. 영어에서는 ‘with’와 ‘together’로 되어 있다. 찬양과 감사의 생활은 개인적인 것이 먼저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교회 생활 즉 단체적인 실행임을 알 수 있다. 내가 혼자 서기 정말 힘들 때, 감사보다는 불평이 나오고 또 여러가지 우울한 일들을 통과할 때,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함께’하면 능히 이길 수 있다.
주님,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양합니다. 그 구원하심을 붙잡고, 능력의 이름 예수를 높입니다. 우리 가운데 배가 (倍加) 되시고 또 배가되소서. 오늘 혼자서도 주님을 찬양하며, 또 주님의 유기적인 몸된 교회 안에서도 찬양하며 좋으신 주님을 맛보게 하소서.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