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행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거기에는 벌이 따른다 (21절). 그런데 같은 죄인이라도 여호와를 경외함을 배워 그의 자녀, 그의 백성 그리고 그의 종된 이들은 여호와께서 그 혼들을 속량하신다 (22절). ‘속량’이라는 말은 ‘구속’과 같은 말이다. 즉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오는’ 것인데, 바로 우리가 얻은 구원, 즉 소속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전에는 죄에 속해서 죄의 노예였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값이 치뤄졌고 속량 되었다.
이들은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의 옷을 입고 주님의 백성들이 된 자들이다. 그래서 악을 떠나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11절). ‘배우다’라는 것은 구약적인 개념같이 들린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영을 따라 행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일 2:27에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는데, 마치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 처럼 들리지만, 사실 오히려 생명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더욱 배워야 함을 말씀한다.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도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하신다. 어제 말씀에서 항상 그리고 함께 여호와를 찬양함을 말씀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외를 배움’을 통해서임을 말씀한다.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가 없으면, 또 그 경외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그 분의 어떠하심을 인한 찬양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경외’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지만, 단지 무서워서 떠는 것은 원시적 신앙이라면, 그의 광대하심과 그 거룩하심,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떠하심과 놀라운 자비하심 등을 알 때 단지 무서워 떠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며 ‘떨’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분을 ‘배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배운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누린다. 또 누린 만큼 찬양할 수 있다. 주님, 나로 주님을 온전히 찬양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