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가지고 믿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아는 것이고, 선과 악을 넘어 생명을 붙잡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에서 선악의 문제는 그 시작이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먹은 때 부터였다. 롬 7:21의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라는 말씀 처럼 그때부터 내 안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고, 여기에서 갈등이 온다. 문제는 과연 선악의 기준이 무엇인가?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착한 일’과 ‘악한 일’은 어떻게 정하는가? 예를 들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은 악한 일인가? 아니면 남을 도와주는 것은 무조건 착한 일인가? 촛불 집회에 나가는 것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탄핵 반대 집회에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이방인들의 무지에서 오는 선행 역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야 하고, 죄인으로서 어느 정도의 선행 역시 인정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모든 것들의 근원은 결국 인간의 교만과 두려움 등 잘못된 것 즉 '악'에서 기인한다. 무엇을 하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할 때, 또 생명의 원천을 구할 때 선과 의의 편에 서게 된다.
오늘 생명의 삶 해설에는 ‘악인의 삶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해 자신에 대한 신뢰로 마칩니다. 그러나 의인의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라고 한다. 너무도 적절한 해설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악의 구분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진정한 의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선악을 구분하려는 노력 보다는 온전한 선과 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해야 하는데, 결국 이는 ‘생명’과 빛 비춤의 문제임을 말씀한다. 9절은 “이는 생명의 원천이 주와 함께 있으며, 주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빛을 볼 것임이니이다” 라고 말씀하는데,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주께서 빛 되심으로 선과 악이 드러나며 분별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 이라는 구절의 원어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인데, 비슷한 구절이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에도 나온다. 여기 ‘생명’이라는 단어는 ‘시대’ ‘삶’ 혹은 ‘생명’ 등 같은 단어이지만, ‘원천’과 ‘근원’은 다른 단어로, ‘근원’은 ‘분출, 쏟아져 나옴, 끊어짐’ 등의 뜻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생명이 나오는 곳이 아니고, 삶의 ‘이것저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함을 말씀한다.
그런데 히 5:14 조금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하는데, 마치 하나님은 필요없고 자신들의 ‘지각’을 기준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문맥상 그런 말씀이 아니라 ‘배교’에 대한 경고를 하면서 지각을 사용해서 생각해 보면 결국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 즉 연단 외에는 선악에 대한 기준이 없음을 말한다.
주님, 생명과 빛이신 그리스도를 오늘도 구하고 바라며 얻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빛 비추실 때 모든 것은 그 정체가 드러남을 봅니다. 먼저 저를 비추시고 부끄러움을 당하기 전에 주님 앞에 저의 숨긴 것들이 드러나고 주 앞에 온전히 다루심 받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