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은혜 시대이기에 구약적인 관념과 경륜을 좇는 것은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구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혹자는 구약의 여호와의 모습이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과는 너무 다르기에 인정하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우기 구약은 엄밀히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이 거의 대부분인데 반해, 신약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만물을 말씀한다 (엡 1:10).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잘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오늘 말씀의 ‘영원’이라는 단어같다.
구약의 ‘영원’에 대한 개념은 ‘영원한 언약, 영원한 규례, 영원한 기업’ 등 보통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단지 지나가는 순간처럼 짧은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허락된 대부분의 복은 소위 살아있는 동안에 안전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약에서도 인생(mortal)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약속은 종종 등장하고, 특히 오늘 말씀을 포함해 시편에 4-5구절이 등장하지만, 사실은 창세기부터 인간의 영생에 대한 암시가 깔려있다.
창 3:22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라고 말씀하는데, ‘이 사람, 그가’ 등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담의 인격 자체에 대한 영생을 말씀하는 것이다. 영어에는 survived by 라는 말이 있는데, ‘유족’을 의미하지만 굳이 survived라는 말을 쓴 것은 아마도 유족을 통해 그가 생존한다는 의미일텐데, 아담이 후손을 낳음으로 간접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가 영생함을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 당시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텐데, 하나님은 오히려 영생을 말씀하신다. 시편 133:3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하며 궁극적인 복은 영생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전 3:11).
오늘 말씀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27절)’ 라고 시작하는데, 소위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 처럼 말씀한다. 이에 대해 생명의 삶 해설은 ‘이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즉 선악의 문제는 하나님께 붙어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인간의 천연적인 선은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성경은 분명히 한다 (롬 3:23).
34절은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고 말씀하는데, 요 1:18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핵심이 ‘영생’ 혹은 ‘생명’임을 분명히 하셨다. 요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당신 자신에 대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계시하셨다 (요 14:6). 그리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즉 하나님과 또한 (그 하나님과 동격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임을 말씀하셨다 (요 17:3).
주님, 악인이나 의인이나 후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은 정죄함을 면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오늘에 적용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더 알게 하소서. 믿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