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유대인 성경에서 찾아보면 1절은 8장의 마지막 절로 되어있고 (원래 성경은 장절의 구분이 없지만) 9장은 2절로 시작한다. 그리고 내용에 조금 차이가 있다. 8장에서 9장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6절이 있고 다시 이스라엘과 주위 국가들에 대한 예언이 있다.
이번 주일은 크리스마스라서 생명의 삶에서는 본문 구절을 택한 것일텐데, 크리스마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느낌이 있다. 첫째, 크리스마스는 절대로 예수님의 생일일 수가 없고 오히려 여러 이방 민족들의 혼합된 절기를 대표한다는 것에서 오는 허무감이 있다. 로만카톨릭이 여러 종교 배경의 사람들을 통합하기 위해 주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절기를 만든 것이다. 사실 주님은 한번도 ‘나의 생일을 기념하라’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 ‘내 피로 세운 새 언약’ 즉 당신의 죽음을 기념 (기억)하라고 하셨다. 주님의 진짜 생일은 아마도 늦여름 정도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동시에, 특히 미국에서 political correctness를 위해 즉 특정 종교를 옹호하는 것을 버리고 ‘평등함’을 위해 더 이상 ‘메리 크리스마스’ 즉 기독교적 용어를 쓰지 말고 아프리카나 그 외 여러 지역의 토종 종교, 그리고 유대교 절기 등 여러 민족들의 절기를 대표하는 기간에 ‘해피 할리데이스’를 쓰자고 지난 10여년 간을 주장해 왔는데,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오히려 ‘메리 크리스마스’를 쓰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이 든다. 이러한 이중적인 마음이 나에게 있다. 사실 매일이 믿는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이고, 또 매일이 부활절이다.
아무튼 오늘 말씀 구절 중 6절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데, ‘이는’ 이라고 시작한다. 히브리어로 ‘키’ 라는 발음의 단어인데, 우리 말로 ‘이는, 대게, 즉’ 등의 뜻이다. 원어에는 4절과 5절 역시 같은 단어로 시작하다가 6절에 마지막으로 쓰임으로 앞의 모든 내용은 6절로 결말을 맺는다. 신기한 것은 3절에 ‘이 나라’, 그리고 7절에는 ‘그의 왕국’ 등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에 6절은 반드시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고, 주님 오셨을 때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된 것을 헤롯에게 말해줬던 것 처럼 (마 2:4-6) 사람들은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그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개정판은 번역했는데, 히브리 원본을 참고하면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 정부 (권력, 권위)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불리리라 – ‘신기 (기묘)’ ‘상담하다’ ‘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화평의 통치자’라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기묘자’ 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wonderful로서 명사인데, 그 뒤의 ‘모사’ 혹은 ‘상담자’는 동사이다. 하지만 붙여서 ‘신비로운 상담자’로 이해하고 번역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모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또 다른 보혜사 (요 14:16)’의 ‘보혜사’와 같은 의미이다.
메시야는 그 첫째 특징이 ‘정치적’인 인물이다. 먼저 나온 단어가 ‘정사’ 즉 권력과 권위를 어깨에 두른 분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압제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신비롭게 상담해주는’ 분이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아이로 태어나고’ ‘아들로 주어진’ 분 즉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 분인데, 또한 ‘능하신 하나님’ 또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린다. 어떻게 ‘아이’ 혹은 ‘아들’이 ‘하나님’ 혹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소위 ‘성육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성육신은 정말로 놀라운 사건인데, 이것은 주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깨닫고 단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주님의 본을 배워서 우리에 비해 상황이 좋지 못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성육신은 그 보다 훨씬 더 깊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뒤엎는 사건이다.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신격이 시간에 제한을 받는 인격 안으로 뛰어 드셨다. 하나님이 인간되셨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다!
이 정도로 분명한데 왜 유대인들은 주님을 배척했을까?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성육신도 거치는 것과 어리석어 보이는 사건이다. 성경 말씀대로 그의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고, 이제 이방에게 그의 은혜의 빛이 비추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주님의 생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기에 ‘해피 버스데이 지저스’ 라는 말은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지 주님 오심을 기뻐하고, 그냥 2천 년 전에 육체로 오셨던 그 옛날 주님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육신의 비밀을 더 깊이 배우고, 성령이 오셔서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념하는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다.
주님, 어릴 때 꿈에 부풀어 선물 받기를 바랐던 그런 순수하지만 유치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번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정말 저에게 생명 되시고 부드럽게 조언하시며, 화평함으로 통치하시는 지금 살아계신 주님으로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분이 계심을 인해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