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치 혹은 친구들이 내가 힘든 상황에 있을 때 나를 멀리하고 피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내가 현실적 도움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에 시험거리가 되면 심각한 좌절감을 맛본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 역시 아마도 공동체에 짐이 되거나 바른 본을 보이지 못했을 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사람 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을 신뢰하거나 도움을 얻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인생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도 있다. 

 

38편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부르짖고 죄를 토로했던 시편 기자는 15절과 20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삶이 녹록치 않고 내 죄성 또한 무시 못하지만, 그럼에도 ‘여호와를 바라’고 또 ‘선을 따른다’고 고백한다.  부대끼는 현실 속에서 좌절감과 무력감 그리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것을 통해 절대자이신 여호와를 바라보게 된다.

 

20절은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다른 몇몇 번역에는 ‘선을 행하는 것 때문에’ 라고 번역했지만, 자신의 죄악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여호와 앞에 당당하게 선을 행한다고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따르다’ 라는 히브리어 ‘라다프’는 ‘따르다, 추구하다, 좇다’ 등의 뜻이다.  그런데 그 추구하는 것이 ‘선’인데, ‘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우브’로 ‘아름답다’의 의미 외에도 ‘좋다, 훌륭하다, 탁월하다, 높다, 즐겁다, 기쁘다’ 등 여러가지 좋은 뜻이 포함된 단어이다.

 

그와 비슷한 헬라어 단어로 ‘칼로스’라는 말이 있다.  13:8의 ‘좋은 땅’이나 요 10:11의 ‘선한 목자’ 등 신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아름다운, 탁월한, 뛰어난, 쓸모있는, 멋진, 이상적인, 좋은, 귀한, 정직한’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 많은 경우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주님은 ‘절대 선’이고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주님, 죄와 허물 그리고 실수가 많은 인생이지만, 절대적인 선이신 주님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그 아름다움을 맛보고 누리기 원합니다.  삶 속에서 경험하는 좌절감이나 죄책감 등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다 이루신’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바라옵기는 공동체안에 더욱 생명이 흐르게 하시고 서로가 힘과 용기를 불어넣도록 쓰임받게 하시며, 만져지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비하신 능력이 임하시기 원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추구하고 그 임재 하심을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