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많은 재앙에 둘러싸여 있고, 죄악이 나를 덮치고,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12),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17),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6)’ 라고 고백한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짝퉁인 이슬람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바로 ‘알라후 악발 (혹은 아크바르)’ 이다.  즉 ‘알라는 위대하다’ 라는 뜻인데, ‘알라’라는 말은 중동 지역의 일반적인 ‘신’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이슬람 역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기에 알라를 위대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그냥 ‘호 떼오스’일 뿐이다.  위대하기는 하지만 유일신으로서 어쩌면 너무 거룩하기에 사람과는 별 상관이 없고 그래서 성육신을 할 필요도 없이 단지 신격으로서 능력만 보이는 존재이다.  그래서 거기서도 마호메트라는 매개체적 인물이 필요한데, 마호메트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는 달리 역사적으로도 객관적인 평가로도 또 자신의 고백으로도 그냥 사람일 뿐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다’와 ‘알라후 악발’에는 또 하나의 큰 차이가 있는데, ‘알라후 악발’이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단순한 의미 외에도 성경 처럼 ‘알라가 함께 하면 우리도 강해진다’ 등의 의미로 쓰이기는 하지만, 인간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알라’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이 그리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여호와는 위대하다’의 원어는 ‘익달 야웨’인데 ‘익달’의 어원은 ‘가달’이라는 단어로 ‘성장하다, 커지다, 위대해지다’의 의미이다.  즉 ‘여호와는 위대하다’의 원 의미는 ‘여호와는 위대해 지소서 (Be magnified)’ 라는 의미이다.

 

특히 이 위대해 지는 것은 16절 처럼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가 ‘항상 말하’는 것인데, 즉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커지고, 확장되고, 배가되어 지기를 소원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이미 그 어떤 만물 보다 위대하신 주님께서는 더 이상 위대해지실 수 없지만, 우리와의 관계 안에서는 그 분은 끝없이 위대해 지실 수 있다.

 

주님, 위대하신 주님께서 그 위대하심을 단지 주님의 어떠함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 위대해 지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한 해를 보내며 위대하신 주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극히 적은 부분만 얻으실 수 있게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위대하심이 내 안에서 더욱 배가 되셔서, 죄악들을 모두 밀어내고 가난과 궁핍이 사라지게 하소서.  더욱 나눌 수 있도록 내 안에서 채우소서.  여호와는 위대하십니다.  나와 내 가정, 그리고 주님의 교회 안에 배가(倍加)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엮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