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이라는 말이 '돈을 쌓다'라는 의미이듯, '적선'은 '선을 쌓다'라는 의미로 원래 불교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소위 '거지'들이 사람들에게 손 벌리며 하던 말이 '적선 한 푼 합쇼' 였다. 즉 자신들을 돕는 행위가 '선을 쌓는 것'이고 이는 도움을 받는 자신들을 위하는 것도 있지만 엄밀히 도움을 주는 이들에게 선을 쌓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은 힌두교나 불교 국가들을 방문하면 아직도 존재한다.
'적선'이라는 말이 불교적 개념이라서 기독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기독교 역시 적선을 말하고 있다. 물론 선을 쌓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선행에 대한 상은 분명 있고, 오늘 말씀 1절 처럼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어서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실 것을 말씀한다. 2절과 3절 역시 선을 행하는, 특히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이들이 받는 복을 말씀한다.
사실 주님께서도 '선을 쌓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다. 마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눅 6:45에서도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역시 말씀하셨다.
그런데 선을 쌓아서 선을 내며 선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인지는 아니면 먼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선을 쌓아서 선을 낸다는 의미인지 (악인 역시 그런 순서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는데, 문맥상 타종교의 '행함'과는 다르게 역시 우선은 '생명'의 문제임을 말씀한다. 즉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내고, 또 '독사의 자식들'이 '악함'을 말씀하며 '선한 사람 됨'이 먼저임을 제시하신다. 이것이 불교적 '적선'과는 다르다. 즉 자신을 위해 선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그 마음에' 선을 쌓는데, 그래서 그 '마음의 보고 treasure of the heart' 로부터 선을 내는 것임을 말씀한다.
하지만 악인은 '그의 중심에 악을 쌓'고 있음을 폭로한다 (6절).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거듭나지 못하고, 자신의 악함을 십자가로 하루하루 처리하지 못하며, 부딪히는 일들마다 악을 쌓으면 주님과 원수됨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우기 그 쌓은 악은 속에만 있지 않고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한다 (6절). 공동체를 좀먹는다.
주님, 마음의 문제가 큰 것을 봅니다. 올해가 저무는데, 저의 마음에는 어떠한 보고가 있는지요. 주님 살피시고 제 인생 가운데 악을 제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제가 어찌하기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새해에는 마음에 쌓는 보고가 주님의 어떠함으로 풍성하게 하소서.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하는 하루하루 되게 하소서. 그러한 선이 쌓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