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오늘은 내용이 너무 길어서 요약하자면 - 우리의 믿음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 주신 질서와 하나님 경외와 권위의 비밀 안에 있어야 한다.)
1장의 여러 문제들을 배경으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 목적은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다. 보통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과 올바른 다스림을 실천하도록 기도해야 하지만, 결국 이 땅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 즉 우리의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 생활을 위함이다. 그래서 이를 위협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촛불이건 태극기건 들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1절의 ‘첫째로’ proton panton)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다 (3절)
1절에는 기도의 종류를 열거하는데, 첫째로 ‘간구’가 있다. 말 그대로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에게 간절히 구할 때 허락하시고 주신다.
둘째로 ‘기도’는 원어로 ‘프로수케’인데,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암시하는 단어이다. 즉 따로 시간을 내어서 정해진 장소 (특히 회당 등)에서 하는 기도이다. ‘프로스’와 ‘수코마이’의 합성어인데, ‘앞으로’의 ‘프로스’ 그리고 ‘기도하다’의 ‘수코마이’는 앞으로 숙이는 ‘자세’도 암시된 단어같다. 편하게 어디서나 하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따로 시간과 장소, 그리고 합당한 자세를 취해서 구하는 기도가 있다.
‘도고’ 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기도’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것으로 타종교에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고’라는 말은 다른 종교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인데, ‘엔툭시스’라는 단어로 오늘 딤전2장과 4:5에만 나오고, 그 동사형도 사도행전, 로마서, 그리고 히브리서 등 5번만 등장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매우 특이하기 때문에 한국어 여러 번역판이나 중국어 성경에도 ‘중보, 간청, 대구, 전구’ 등 모두 다른 말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이 개정역에서는 롬 8장 17절과 34절에 ‘간구하다’로 번역됐고, 롬 11:2에는 ‘하나님께 고발하되’로 번역됐다. 그런데 영어 여러 번역에서 ‘intercession’ 혹은 ‘intercede’로 번역해서 이것을 ‘중보’라는 말로 쓰게 되었다. 그런데 5절에 나오는 ‘중보’라는 단어는 ‘버금 중 仲’ 그리고 ‘보호할 보’를 쓰는데, 제대로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말이 아닐까 하는데, 매우 ‘종교성’이 짖은 말이라 오히려 법적 용어인 ‘중재’가 훨씬 더 성경적일 것 같다. 그런데 이 ‘중재’라는 말도 ‘도고’와는 다른 말이다.
‘엔툭시스’의 뜻은 ‘~와 함께 떨어짐, 만남, 인터뷰, 함께 모임, 방문, 대화, 구함’ 등인데, 그 동사형은 ‘엔툭카노’로, ‘안’을 의미하는 ‘엔’과 ‘(화살로) 표적을 맞추다, 도달하다, 달성하다, 발생하다, 만나다’ 등을 뜻하는 ‘투카노’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어떠한 표적이나 목적에 대해 함께 화살을 쏘듯 혹은 대장장이 둘이서 달궈진 쇠를 놓고 때리듯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어진 목적에 대해 함께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도고’라는 말에 ‘버금 중’이라는 단어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5절에 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좋음’과 기쁨’을 의미하는데, 그 어원은 ‘은혜’이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거나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할 수 있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이미 주신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4절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사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온전히 구원받는 이들은 그 수가 적을 것이다 (마 22:14, 눅 13:23-25).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본심'을 말씀하는데, ‘원하시느니라’의 단어는 ‘의지’를 뜻하는 매우 강한 단어다.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며 삶을 산다.
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하는데 왜 ‘중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지 말해준다. 여기의 ‘중보’라는 단어는 ‘메시테스’라는 단어로 ‘둘 사이를 화목케 하는 중재자’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영어로 mediator라고 번역한다. 우선 이 단어는 단수이다. 즉 너도 중보하고 나도 중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중보자가 계신다.
사실 ‘중보’ 보다는 ‘중재’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이 중재자의 자격은 ‘하나님과 사람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신 그리스도’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중재가 가능하심을 말씀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려면 온전한 신성이 있고 죄가 없어야 한다. 그러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실 수 있다 (6절).
7절에는 먼저 남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데, 모든 남자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 (7절). 남자들에게 ‘분노와 다툼’이 문제인 것을 본다. 바로 앞 절에 ‘중재자’를 말씀했는데, 남자들은 이러한 진리를 쉽게 잊는다. 우리 남자들 사이에 다른 ‘잘난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신다. ‘거룩한’ 이라는 단어는 보통 쓰여지는 ‘하기오’라는 단어와는 다른 ‘호시오스’라는 단어인데, ‘죄 없는, 더럽지 않은, 종교적으로 흠없는’ 등의 뜻이다. 기도하려면 삶 자체가 깨끗해야 한다. 기도할 때 손을 들고 기도하면 ‘거룩해’ 보이는데, 사실 문맥상 ‘거룩한 손’ 보다는 ‘들어’ 라는 단어가 더 중요하게 들린다. ‘손을 들고’ 하는 기도는 내가 거룩한 사람을 의미하거나 내가 다른 이들을 축복한다는 의미보다는 ‘항복’을 의미한다. ‘분노와 다툼’을 그치고 주님 앞에 그리고 서로 간에 항복하는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여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데, 성형, 다이어트, 화장, 장신구 등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기준을 말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책임 의식을 준다. ‘이와 같은’ 것 즉 남자들의 본이 먼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한글킹제임스에서는 ‘이와 같이 여자들도 검소한 옷차림으로 스스로를 단장하되 수줍음과 정숙하게 하며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비싼 옷으로 하지 말고’ 라고 번역했는데, ‘단정’ 혹은 ‘검소’로 번역된 단어는 ‘카타스톨레, 낮추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수줍음과 정숙을 말씀한다. ‘땋은 머리’는 그냥 ‘땋은’ 것 자체가 아니라 돈을 많이 주고 꾸민 머리이다. ‘금, 진주, 비싼 옷’ 역시 치장을 위해 많은 돈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것 대신 ‘선행’으로 ‘하나님 경외’함을 고백해야 한다. 과연 현재에 이러한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어느 정도 자신을 잘 관리하고 꾸미는 것은 필요하지만 결국 비싼 값을 주고 외모를 치장하는 것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임을 말씀하다.
11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마치 ‘여자는 입 닥치고 시키는대로 해라’는 말씀처럼 들리는데, 원어는 ‘여자는 조용함 안에 모든 순종 안에서 배우고 있어야 합니다’ 이다. 그 말이 그말 같지만 느끼는 어감이 다르다.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들을 수 있다. 여자는 주님의 질서 안에서 조용히 배워야 하고, 남자를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즉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는 가르칠 수 있지만, 남자를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치다’는 말은 ‘주도한다’는 의미가 있다. 현실에서 항상 남자가 여자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관’ 즉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관’의 원어는 ‘아우뗀테오’인데, 영어의 authentic의 어원이다. 그 의미는 ‘자신이나 다른 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다,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다, 절대적 주권을 갖다, 다스리다’ 등의 의미인데, 생각해 보니 무시무시하다. 성경에 여기 단 한번 나온 단어인데, 왜 바울은 (아마도 아직 미혼인) 젊은 디모데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걸까?
권위의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 (10절)’하는 문제와 그리스도의 주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적은 문제가 아니라 사실 심각한 문제이다. 바울은 창조의 순서(13절)과 타락의 순서(14절)도 언급하며 이에 대해 경계한다. 이것은 여자들이 속된 말로 ‘김빠지게’ 할 수 있고, 남자들에게는 일종의 두려움을 줄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인데, 바울은 이것을 여자에게 말하고 있지만, 디모데는 교회를 섬기는 이로서 이 말씀을 여자들에게 전해야 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 말씀으로 여자들을 윽박지를 수 없는데, 먼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자들은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을 것인데 (15절) ‘해산함’ 역시 신약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 childbearing 즉 아이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여자로서의 본분 즉 가정을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계속해서 ‘질서’와 ‘주권’의 연장이고, 이에서 오는 '기능'에 대한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이지만 이러한 질서가 무너질 때 우리는 교회가 왜 타락하는지 알지 못하고 타락을 경험한다. 여자들이 근대에 산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재정적인 이유도 있지만 결국 영적인 것 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살림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가치와 기대치가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자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것이 소위 ‘천당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주님을 누리고 동행하는 것이라면, 여자들은 원래 주어진 자신의 본분에 충실함이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 세상은 주님의 말씀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히려 이슬람의 여성 억압을 보는 듯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무너진 것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부흥을 가져 오시기 기도합니다. 남편은 남편의 일로 가정과 주님 앞에 인정받고, 아내는 아내의 일로 동일한 기쁨과 인정 받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