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나눔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연구하고 이를 나누는 것이기에 어쩔 수가 없네요. 요약하자면 교회에서 직분을 세우는 문제는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처음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복음을 붙잡는 것과, 창조의 질서부터 오는 권위 문제를 다루다가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15절)의 감독과 집사가 되기 위한 자격을 설명한다.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신 교회를 돌보기(5절) 위해 세우신 권위를 말씀하는데, 보통 교회의 직분은 장로와 집사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감독과 집사를 언급한다. 즉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이지만 감독은 그 기능적인 면을 더 많이 설명하는 말이다.
1절은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고 말씀하는데, ‘얻으려 하다’는 ‘원한다, 바란다’의 의미이다. 믿음의 형제가 영적으로 성장해서 감독의 직분을 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다. 즉 교회의 가장 권위있는 직분인 감독 혹은 장로가 되기 원하는 것은 그 위치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 먼저이고 또 전부이다. 교회를 돌보기 위함이 그 마음의 모든 것 되어야 한다.
‘선한 일’은 원어로 ‘칼루 에르구’인데 ‘이상적인, 탁월한, 빼어난’ 등을 의미하는 ‘칼로스’와 ‘행함’을 의미하는 ‘에르곤’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이상적인 행함을 본 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모하다’의 원어가 ‘에피뚜미아’ 즉 원래의 의미는 ‘음욕을 품다’로서 매우 강한 갈망을 나타낸다. 마음 속에 품은 이 사모함은 음욕을 품을 정도의 강한 갈망이어야 하고, 그러한 갈망으로 착한 일을 하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 감독의 우선적 자격이다.
‘감독’이라는 말은 ‘에피스코페’인데, 동사형 ‘에피스켑토마이’에서 온 것으로 이 동사는 ‘돌아보다, 관찰하다, 살펴보다, 도움을 주기 위해 알아보다’ 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5절의 ‘교회를 돌보리오’와 상통한다. 그래서 성경적 감독은 ‘디렉터’나 ‘절대군주’ 혹은 '교황'이 아니라 교회의 자세한 사정들을 잘 살피고 돌아보아 그 필요를 채우는 직분이다.
그래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 (2절)’어야 하는데, 원어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있다. 즉 감독으로 섬기는 이들은 반드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아.. 누가 감히 감독의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선한 일을 갈망하는’ 이들은 책망할 것을 넘어서는 삶을 산다. 이것은 신학교 졸업하고 교역자가 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밝혀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6절에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라고 말씀한다.
감독이나 집사나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데 (2, 12절). 즉 미혼자나 혹은 아내가 둘 이상 되어도 자격이 없다. 당시 사회나 현재 몇몇 문화에서는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이 그리 큰 흠이 아닐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이들은 그 어느 문화에서건 한 명의 아내만이 허락된다. (물론 이미 있는 아내와 이혼하라는 말은 아니기에 이들은 직분없이 섬기면 된다.)
7절까지 그 외의 자격은 모두 ‘인간됨’ 혹은 ‘성품’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학력이나 경력을 중시하는 오늘과는 너무도 다르다. 3절에는 8절 집사의 자격 중 하나인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음’도 원어에는 역시 있다. 감독은 더러운 이를 탐하지도 말아야 하고 돈을 사랑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중에 ‘가르치기를 잘하고’ 라는 자격이 있다. 즉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성품을 다루는 다른 자격들과는 달리 감독의 기능 중 ‘가르침’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이것은 온전한 복음과 관계있다.
감독은 교회를 ‘돌보지’만 자기 집은 ‘잘 다스린다’ (4절). 그래서 자녀들이 권위를 인식함으로 ‘복종’하게 한다. 여기 ‘잘’도 역시 ‘이상적’이라는 의미의 ‘칼로스’인데, ‘다스리다’는 마음대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프로이스테미’라는 단어로 ‘먼저 본을 보이다, 이끌다, 보호하다, 도움을 주다, 보살피다’ 등의 의미이다. 아.. 성경적인 다스림의 의미가 이렇게 다를 줄이야... (물론 앞으로 이기는 자들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는 것은 정말로 정치적인 다스림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장한 자들이기에 독재자의 포악한 다스림과는 다른 것이다)
6-7절은 한글 킹제임스역이 번역을 제대로 했다. ‘초신자여서도 아니되나니, 이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 마귀의 정죄함에로 빠질까 함이라. / 또한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할지니, 이는 그가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이유만으로 믿음도 없고 성경 지식도 없는 이가 감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를 우습게 보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르게 되어 결국 ‘마귀의 정죄함’ 즉 마귀가 정죄받은 그 교만의 정죄를 받게된다.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역시 본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8절부터는 집사에 대한 자격을 말씀하는데, 이제까지 ‘감독’은 단수로 썼다면 집사는 복수로 쓴다. 즉 ‘집사들’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썼을까? 감독에 대해 소위 ‘담임목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일까? 즉 감독 혹은 장로는 한 교회에서 한 명만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다른 서신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한 교회에 여러 장로들과 집사들이 존재한다. 아마 바울은 감독에 대한 자격을 말하면서 앞으로 감독 될 이들에 대한 자격을 말하지만 동시에 디모데를 감독으로 보고 그에게 이러한 자격을 돌아보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때 디모데가 기혼이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감독의 자격을 말하면서 디모데에게 (아직 미혼이었다면) 결혼하라는 암묵적(?) 조언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흠..
아무튼 ‘집사’라는 단어는 직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단어이기는 하지만 그 단어 자체는 ‘섬기는 자’이고 ‘기다리며 시중드는 자’의 의미다. 그런데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면 ‘수행자’라는 의미도 있는데, 즉 자신의 기준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인’의 명에 따라 섬기는 이들이다. 그들이 수행하는 이는 먼저 그리스도시고, 교회의 질서 안에서 장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 혹은 감독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 그런데 집사의 자격의 첫째가 ‘정중하다’이다. 왜 이런 말을 썼을까? ‘섬기는 자’ 혹은 ‘시중드는 자’라고 가볍게 일을 행하면 안된다는 의미같다. 자신의 섬김은 그리스도를 수행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고, 그래서 그의 섬김에는 무게가 있다. 거만하게 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사에 신중하고, 그래서 특히 가볍게 입을 여는 즉 ‘일구이언' 하지 말아야 한다.
감독이나 집사들이나 ‘술’에 대해 언급하는데, 감독이 ‘술을 즐기지 아니’한다면 집사들은 ‘술에 인박이지 아니’해야 하는데, 원어에서는 집사들이 ‘많은 술에 중독되지 않아야 한다’로 되어 있다. 즉 알콜 중독자가 아니어야 한다. 술에 대해 바울은 감독이나 집사나 다소 너그러운 입장을 보이는데, 앞으로 4장 4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라는 말씀 처럼, 술 역시 절제함으로 쓰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술을 마시면 끝장을 보는 한국인 술버릇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술에 대한 언급은 감독이나 집사가 아닌 일반적인 형제 자매들은 알콜 중독이 되어도 괜찮다는 말씀은 아니다. 감독이나 집사나 이러한 면에서 본을 보여 다른 형제 자매들도 절제함으로 그 본을 따르기 위함이다. 감독이나 집사의 특별한 금기 사항이 아닌 것이다.
감독이나 집사나 ‘더러운 이를 탐’하는 문제에 대해 경계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간교해서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더러운 이를 탐하는 마음이 들어온다. 그래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문제라 ‘시험’할 필요가 생긴다 (10절). 그런데 개정역의 ‘시험하여 보고’ 처럼 능동형이 아니라 원어에는 수동형으로 되어있다. 즉 ‘시험 받게 하라’ 이다. 이 ‘시험’은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와는 다른, 자격을 위한 시험이다.
살다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교회 생활 안에서도 함께 부딪히다 보면 시험이 따른다. 감독은 이러한 때를 눈여겨 보고 각 사람의 집사 자격을 알아볼 수 있다. 역시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 을 말씀하는데, 원어로는 감독이 ‘구설수에 오르지 않다, 책잡히지 않다’라는 의미라면 집사의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은 ‘비난 받지 않는, 고소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11절은 ‘여자들도’ 라고 시작하는데, 아마도 집사들의 아내들을 말하는 것 같다. 감독의 아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집사의 아내에 대해서는 언급하는데, 아마도 감독의 아내는 같은 자격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숙’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집사의 ‘정중’과 같은 단어이다. 집사의 아내 역시 무게가 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모함하지 아니하며’의 원어는 ‘마귀들이 아니며’ 즉 6절의 ‘마귀’와 같은 단어다. ‘마귀’의 원 의미가 ‘모함하다’ 혹은 ‘참소하다’라는 것인데, 여인들이 함께 모여 남을 모함하고 헐뜻을 때 그들은 마귀가 된다.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다)
12절의 내용은 감독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13절은 ‘대게 이상적으로 섬기는 이들은 그들 자신에게 이상적인 지위와 그 그리스도 예수 안의 믿음 안에서 많은 담대함을 쌓아간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이 중요한 것 같아서 몇 개의 단어를 짚어보면, 먼저 ‘지위’ 라는 단어 ‘바뜨모스’는 ‘한계, 스텝’을 의미하는데, 이 역시 신약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서 ‘바또스 (깊이, 높음)’가 어원이다. 바울은 딤전에서 특별한 단어를 자주 쓴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특별한 단어를 씀으로 경계하려 (딤후 4:2) 했나보다.
‘담대함’은 ‘파레이오’인데, ‘파스 (각각의)’와 ‘레오 (말하다)’의 합성어이다. ‘담대함’ 혹은 ‘확신’ 특히 말하는 것에 대해 담대한 자유를 의미한다. ‘믿음’은 ‘말’ 혹은 ‘선포’와 많이 연관되어 있고, 담대함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믿음은 그 실천함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쌓아가는’ 것이 있다. ‘쌓아가다’로 번역할 수 있는 ‘페리포이에오’는 ‘파라’와 ‘포이에오 (하다, 만들다)’의 합성어인데, 행 20:28 ‘자신의 피로 사신’에서 ‘사다’로 번역된 단어이다. 즉 그냥 시간이 지난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라, 값을 지불함으로 어떤 면으로 ‘경력’이 되고, 이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아마도 집사로 섬기던 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사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적으로 섬기는 이들이 얻는 것은 그 이상인데, 바로 그 삶 속에서 믿음의 담대함을 얻고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사람의 인정 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이 훨씬 중요하지만, 이상적인 믿음 생활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다.
감독이든 장로든 집사든 그 자격은 매우 엄중하다. 그냥 나이가 들거나 몇 개의 프로그램을 이수하거나 출석 잘하고 헌금 잘하면 주어지는 ‘계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직분자들은 얼마나 될까? 단지 ‘은혜’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권위’를 대표하고 진정한 섬김을 행하는 직분은 엄중한 조건이 따른다.
그런데 질문이 생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 섬겨야 하는데 (히 6:10, 벧전 4:10) 왜 이렇게 따로 섬기는 이들을 세우는가?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 섬기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섬김을 받아야 할 성숙하지 못한 이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섬기는 자들은 오히려 ‘큰 자 (마 23:11)’ 들이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교회 생활이다. 그래서 진정한 ‘집사’의 직분은 받지 못했어도 섬기는 이들은 이미 집사들이다. 이들은 다만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인정은 그 주는 자들이 있을텐데, 누가 직분을 주는가? 물론 먼저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이러한 주심을 먼저 인정하고 믿지만, 딤전 4:14에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는 것을 언급한 것을 보아 장로들의 모임을 통해 장로와 집사 직분 모두가 주어진다.
주님, 돌보고 살피며 가르침으로 돕는 감독의 직분과, 나누며 섬기는 집사의 직분을 주의 교회 안에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들이 있기에 교회에 성장이 있고 풍성한 나눔이 있으며 본이 있고 다음 세대의 섬기는 이들이 나타나게 됨을 배웁니다. 우리 가운데 섬기고 수행하는 이들을 온전히 세우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귀한 종들에게 주님 큰 복이 되시고 더욱 담대함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