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역시 길어졌네요. 요약하면, 경건의 비밀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그 분을 닮아가게 함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어로 14절은 ‘너에게 속히 가기를 기대함으로 이것들을 쓰고 있다’ 이다. 그런데 요즘 몇몇 번역본에서 ‘너’를 ‘그대’로 번역했다. 영어처럼 헬라어는 인칭에 대해 존대가 없기 때문에 ‘너’인지 ‘그대’인지 모르지만 한국어로 이 서신이 쓰여졌다면 바울은 자기보다 손 아래인 디모데이지만 그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고 동역자로서 격식을 갖추어 말했을 것 같다. 이러한 격식 차림은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지만, ‘가족’이라는 말 때문에 너무 느슨해 지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 좋지 못하다. (실수를 통해 배운 경험)
15절은 '만일'이라고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확신과 긍정 (아멘)으로 충만하지만 그 확신대로 모든 것이 되어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해서 ‘내일 일은 난 모릅니다’ 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가기를 바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을지라도 ‘만일의 경우’를 말한다. ‘혹시라도, 어떤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르게 인도하시면’ 즉 가는 것이 늦어질 경우를 위해 이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 안에서 반드시(원어에 있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전해준다. 이 ‘하나님의 집’은 보이는 건물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교회’라는 단어도 따지고 보면 매우 잘못된 번역이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에 하나인 이 단어를 고치기도 쉽지 않지만, 결국 ‘교회’란 번역은 ‘종교모임’을 의미하는데, 그 원 의미와는 판이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이미지가 '건물'로 각인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상식이 되었지만, ‘에클레시아’ 즉 ‘밖+부르다’ 라는 헬라어 단어 역시 처음에는 쓰기 매우 어색한 단어였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쓰다보면 익숙해지고 또 사용하면서 그 의미 역시 되새기게 된다. 순 우리말로 에클레시아를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인데, 어차피 한자로 번역해서 ‘밖으로 부르다’를 ‘출소 (出召)’라고 해야 할지 ‘소출 (召出)’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들도 어감이 모두 다른 단어로 (出所 혹은 所出) 들려서 쉽지 않다. 하지만 ‘교회’라는 단어는 좀 고민해 볼 문제다…
아무튼 이 하나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한다. 즉 교회가 집, 하나님의 가정이고, 또한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에는 조직과 제도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조직과 제도는 개혁이 필요하다. 결국 모두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정이라는 단어도 많이 상처를 입은 단어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인데, ‘에클레시아’ 즉 밖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한다.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나 믿는 이들은 문제들이 많이 보이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교회 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데, ‘진리’가 ‘교리’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원래 ‘진리’라는 단어 ‘알레떼이아’는 ‘참’ 혹은 ‘현실’을 의미한다. 즉 앞으로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에 속한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이다. 그래서 참된 현실이 된다.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발전해도 영원하지 않다. 다만 영원한 것이 참된 것이고 현실이다.
그래서 16절에는 이 교회와 연관되어 ‘경건의 비밀’을 말한다. ‘경건’이라는 단어가 개정역에는 48번 나오는데, 원어가 다양하다. 영어도 godliness로 번역된 것이 있고 devout로 된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번역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원어는 ‘유세베이아’인데, 지난 2장 2절, 그리고 4장 7, 8절, 또 6장 3, 5절에도 같은 단어가 쓰였다. 마치 바울의 디모데 전서의 주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유세베이아’는 자주 나오는 의미있는 단어다. ‘좋다’는 뜻의 ‘유’와 ‘존경하다, 경외하다, 예배하다’의 의미인 ‘세보’의 합성어를 원어로 가진 단어인데, 결국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삶이 현실에서 진리의 기둥과 터로 나타나는 에클레시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경건에는 ‘비밀’이 있다. 비밀 ‘미스테리온’은 무엇인가 감추었던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인데, 그 설명을 바로 이어서 하고 있다. 생명의 삶 해설은 초대교회에서 불렀던 찬양이고, 경건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예배하는 것이 성도의 최대 소망이라고 해석하는데, 그 보다 조금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과연 이것이 왜 ‘비밀’인지, 왜 그리스도께서 ‘경건의 비밀’인지, 왜 이 비밀이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즉 ‘호모로구메노스’ 즉 ‘이구동성’ 혹은 ‘폐일언’ 하는 문제인지, 왜 이 문제에 대해 그리도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의 도전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감추었던 것이 드러난 것은 바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데, 개정역에는 ‘그는’ 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하나님은’ 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사본 중에 ‘그는’ 으로 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 바로 인간이신 예수 ‘그’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즉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는데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신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되셔서 인간으로서 '감취었던 분이 성육신을 통해 드러나신' 것 뿐만 아니라, 이 ‘경건의 비밀’도 드러났는데, 바로 하나님이 인간 되심으로, 인간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는 길(벧후 1:4)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부활을 가져왔는데, 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 (고전 15:20)’신 것은 부활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고, 또 결국에는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 (1요 3:2)’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것 혹은 자기 자신이 신이라는 뉴에이지의 가르침 혹은 당시의 영지주의나 금욕주의 혹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등 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고 의지하며 고난을 당하며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통해 (4:7절)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그의 성육하심은 또한 인성을 신성으로 이끄신다. 즉 ‘신성인성신’ 이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다.
그래서 믿음의 비밀, 경건의 비밀을 가진 사람은 ‘외식함으로 거짓말하’지 않는데, (물론 베드로도 외식한 예가 있기에 성장하는 중에 가끔 실수도 있겠지만) 특히 먹는 문제에 대해 그렇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선(칼로스)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4-5절)’지기 때문이다. 이틀전 ‘도고’에 대해서 딤전 2장에만 나온다고 했는데, 다시보니 여기의 ‘기도’역시 ‘도고, 엔툭시스’이다. 이 단어는 딤전 2:1과 4:5에만 쓰인 단어다. 즉 모든 피조물은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 가장 이상적이었고, 인간의 죄로 땅이 저주받은 후 조차도 모든 피조물은 선하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즉 은혜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로고스와 ‘엔툭시스’로 성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선하게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을 받을 때 가볍게 받지 말고 은혜와 ‘엔툭시스’로 받아야 한다.
이 문제는 마약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합한 화학물질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지만, 요즘 많은 곳에서 합법화가 되어가는 마리화나 (혹은 대마)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믿는 이들에게 괜찮은 것인가? 우선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허락하신) 것인지 의문이다. 이러한 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엔툭시스’를 통과해야 하는데, 예외는 아마도 있을 수 있지만 분명 말씀과 기도를 통해 더 나은 것을 보여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결혼 문제 역시 ‘경건의 비밀’과 관계있는데, ‘유토피아’에서는 결혼을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것이기에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자유롭게 연애하기를 권한다. 하지만 이것은 타락하여 책임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많은데 결혼하지 않으면 얼마나 책임을 지려하지 않을까. 결혼 역시 ‘경건의 비밀’과 연결되는 이유는 그 목적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고난을 받고 성화 즉 ‘인성신’을 이루기 위함이다.
주님, 주님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신성한 성품에 참예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임을 고백합니다. 타락한 죄인이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니요! 그렇기에 더욱 유일한 길이신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경배하며 오직 하나님 만을 섬깁니다. 나의 어떠함은 항상 실패하지만 주의 생명은 저를 영광으로 올리십니다. 오늘 여러 도전들 가운데 주를 의지하게 하시며, 궁극적인 경건의 비밀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