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앞에 말씀했던) 이것들에 대해 형제들을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라 말한다.  ‘깨우치면’의 원어는 ‘후포티떼미’로 ‘밑으로 넣다, 제시하다, 공급하다’의 의미이다.  왜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가르치라’고 말하지 않고 ‘제시하라’고 말씀했을까?  앞에 언급했던 이러한 진리는 ‘경건’과 관계있고, 이것은 ‘생활’과 관련있으며, 단지 말로만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배우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2).

 

특히 디모데가 이렇게 행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칼로스) 일꾼 (집사)’이 될 것이라 말하는데, 디모데는 연소한 나이에도 (12) 한 교회를 섬기는 막중한 책임이 지워졌다.  하지만 장로나 감독의 위치에 있는 동시에 그 삶으로 본을 보이는 면에서는 일꾼 ‘집사’이다.  집사라는 직분이 이렇게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 형제들을 깨우칠만한 위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을 것인데, 이 구절의 주체는 ‘형제들’이 아니라 ‘믿음의 로고스와 네가 온전히 따르고 있는 이상적인 가르침 (교리)에 대해 양육하는 집사가 되’는 디모데이다.  지금 계속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고 있다.

 

7절 역시 디모데에게 권유하는 말씀인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한다.  ‘망령’은 딤전 딤후 그리고 역시 ‘망령’이라고 번역한 히 12:16에만 등장하는 단어인데, ‘베빌로스’ 라는 특이한 단어로 원 의미는 ‘멋대로 선을 너머 짖밟다’의 뜻, 즉 ‘불경’, ‘일반적인 common’ 혹은 ‘이교도적인’ 등의 뜻이다.  그래서 결국 ‘신성모독’과 관계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허탄한 신화’로 번역된 부분의 원어는 재미있게도 ‘늙은 여자들의 허튼 소리’이다.  ‘신화’라고 한자로 번역해서 좀 멋있는 말 같기도 하지만 ‘참’ 혹은 ‘진리’와 반대되는 말이다.  나이든 여자들을 차별하는 것 같이 들리지만, 누구든 진리에 서지 않고 이교도들이 꾸며낸 옛날 이야기를 지껄이게 되면 ‘허탄한 신화’가 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거부해야 한다. 

 

그 대신 디모데는 경건 ‘유세베이아’로 자신을 연단해야 하는데, 이 ‘연단하다’라는 ‘굼나조’의 어원은 ‘굼노스’ 즉 ‘합당한’을 의미하지만 원래 의미는 ‘(옷을) 벗은’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헐 벗은’ 으로 많이 번역되었다.  재미있게도 영단어 체육관 gym의 어원인데, ‘굼나조’는 옛날 달리기 경주를 할 때 옷을 모두 벗고 뛴 것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연단하라’ 라는 말은 정말 기력을 다해서 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헬라 문화에 속했던 디모데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쓴 것인데, 젊은 디모데에게 한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 말고 경건 ‘유세베이아’에 올인하라는 조언이다. (옛날에 이런 말씀을 조금 더 들었다면 시간을 좀 더 의미있게 보냈을까? 하지만 요즘은 50도 젊다.  힘을 내자!)

 

그래서 8절에는 당연히 몸의 ‘굼노스’를 언급하며 이에 대해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한다.  적당한 운동은 좋은 일이고 건강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많던 세대가 없었을 정도로 요즘은 육체의 건강을 중요시 하지만, 짧은 삶을 위한 육체의 건강에 비해 유세베이아는 모든 것에 유익하고 지금의 생 (조에, 생명)과 바야흐로 올 삶 (조에)에 약속이 있다고 말씀한다.  이러한 것을 위하여 ‘우리’ 즉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여러 주의 종들은 고생하고 핍박받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이다 (10). 

 

11절에서 바울은 강하게 디모데에게 명령한다.  ‘이러한 것들을 옆에서 전하고 가르치고 있으라!  ‘명하다’로 번역된 단어 ‘파랑겔레’는 ‘옆, 혹은 함께’를 의미하는 ‘파라’와 ‘소식, 사신, 천사’ 등을 의미하는 ‘앙겔로스’의 합성어이다.  즉 ‘명하는’ 것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코치’하는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왜 변하지 않는가 궁금해 한다.  말로만 들어서 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옆에서 계속 조언하고 코치해주고 한줄 한줄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눠야 조금씩 변한다.

 

12절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 하는데, 한국인 문화도 그렇지만 헬라 문화 역시 젊은이는 하대했나보다.  특히 신앙에 대해 삶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이는 신임을 얻기 힘들다.  하지만 신앙인의 본이 될 때는 다르다.  모든 것, 특히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본이 된다면 나이가 어려도 ‘코치하며 가르칠’ 수 있다.  원어에는 ‘영’도 포함되어 ‘로고스 안, 행실 안, 아가페 안, 영 안, 믿음 안, 순결 안’으로 되어 있다.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그 말씀대로 행동해야 한다.  아가페 안에 있어야 하고 영 안에 있어야 하며 신앙과 순결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또 동시에 결과적으로 행하는 것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는 것인데, ‘읽는 것’은 ‘아나그노시스’로 ‘아나 (가운데로)’와 ‘그노시스 (기노스코, 지식, 알다)’의 합성어로, 책을 읽는 것의 목적은 알고 깨닫기 위함이다.  그래서 알고 깨달은 것을 권하는데, ‘권하다’의 원어는 ‘파라클레세이로’ ‘보혜사’와 비슷한 단어다.  즉 ‘옆에서 조언하다, 위로하다’의 의미이다.  마치 코치처럼 ‘할 수 있어!’ 라고 계속 용기를 주는 것이다.  올해는 주님 안에서 ‘할 수 있어!’가 충만하기를! 

 

14절은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다.  바울은 연소한 디모데에게 계속 용기를 주는 것 같다.  디모데 안에 ‘은사’가 있는데, 즉 ‘은혜’이고 이것은 디모데가 어떤 자격이 있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한 것이 그의 ‘안에’ 있는데, 이것은 ‘장로회, (단수, 즉 장로들의 모임 혹은 eldership)’에서 안수를 동반한 예언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디모데의 일꾼 된 것은 어떤 많은 종류의 프로그램을 이수하거나 교육을 받거나 혹은 거창한 의식을 통해 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몇 명의 장로들이 그에게 안수하며, 쉽게 말해 ‘덕담’을 해 줌으로 되었다.  그래서 ‘이게 다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는데, 장로들의 ‘안수’가 있고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안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전가’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화’이다.  즉 구약시대에 양이나 염소에 안수하면 나의 죄가 그 동물에게 ‘전가’ 됨으로 나 대신 죽고 나의 죄는 사함 받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 보다는 사실 ‘동일화’의 의미가 더 큰데, 제물에 안수하는 것도 동일화로 보면 이해가 더 빠르고, 장로들의 안수 역시 주의 일꾼을 세울 때 안수함으로 그들의 어떤 능력이나 영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eldership즉 장로됨 혹은 장로자격을 ‘동일화’하여 주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예언 혹은 덕담은 능력이 있다.

 

15절은 원어를 보면 ‘이것들을 묵상하고 있으라.  이것들 안에 너는 있으라.  너의 진전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라.’ 이다. 

 

16절은 행함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 교리를 가진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구원하리라’는 2인칭 능동태이다.  즉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고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네가) 구원’할 것을 말씀한다.  보통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는데, 성경을 다시 살펴보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지, 구원과 행함이 상관없다고는 결코 말씀하지 않는다.  사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믿어 순종하게’ 하고 ‘행하게’ 한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단어는 항상 ‘행함’과 함께 간다.

 

행함의 결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정의한다면 마치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 같이 들려 위험한 것이지만, 정말 나에게 구원이 임한 것을 아는 방법은 첫째로 마음의 변화이고 둘째는 이에 따른 행함이다.  구원은 지옥신세 면하고 단 한번의 시인함을 통해 천국행 티켓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생활이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이 모든 것을 읽으며 숨이 막히지 않았을까?  도무지 너무 요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바울이 디모데에게 거는 기대가 크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면 말이 많아진다.  요한복음 3장에도 겨우 한 두 마디 질문을 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답하신다.

 

주님, 이러한 것들이 지금 이 나이가 되서야 깨달아지니 죄송합니다.  젊은이의 마음으로 얽히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전력질주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이것 저것 쌓아 놓은 헛된 것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게 하소서.  믿는 만큼 행할 수 있음을 봅니다.  저에게 믿음의 진보가 있게 하시고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서로의 성장을 증언하게 하소서.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