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까지의 말씀을 받았다면 이제 오늘 범위의 내용은 꼭 필요하지 않은 '상식'이 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디모데에게 계속해서 일일히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하나님의 계시와 교리와 경건생활은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공동체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절은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라고 시작하는데, '늙은이'라는 말은 '장로'와 동일한 단어이다. 늙었다고 모두가 장로로 섬길 수는 없지만, 장로는 그만큼 성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소한 디모데가 어떻게 나이 많은 이를 꾸짖을 수 있을까? '꾸짖다'는 말은 영어로 rebuke이라고 번역했는데, 마귀를 꾸짖을 때도 rebuke를 썼지만, 이 단어 역시 딤전에 단 한번 나오는 말로 '에피플레소'이다. 그래서 마귀를 꾸짖는 것과는 다른 의미인데, '위'를 뜻하는 '에피'와 '플레소'의 합성이다. '플레소' 는 계 8:12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에서 '타격 받다'의 의미로 쓰였는데 그 어원은 '플라소'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때 흙을 '쳐서 빚다'의 의미이다. 롬 9:20의 토기장이의 비유와 지난 2:13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 (빚어졌다) 되었다는 구절에 나온다.
즉 젊은 리더로서 디모데는 나이든 사람들에 대해 그 영적인 권위를 다 쓰지 말아야, 즉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으려듯 주무르지 말라는 의미이다. 토기장이는 하나님이시다. 대신에 '권하되' 즉 지난 번에 쓰였던 '보혜사'와 같은 의미의 '파라칼레이' 즉 옆에서 권해드리고 위로하며 조언하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잘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ㅠㅠ 이런 이들에 대해 윽박지르거나 하나님 말씀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마치 아버지에게 하듯 대하고, 또 반대로 젊은 남자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말씀한다. 생각해 보면 나의 가족, 특히 자녀들에 대해서는 너무 사적인 감정으로 치우치는데, 어떤 면으로 '남의 자식'처럼 여긴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나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내 가족처럼 생각한다면 유기적인 교제가 시작될 것이다.
2절의 '늙은 여자'는 '늙은 남자' 혹은 '장로'의 여성형이다. 그런데 '늙은이'는 단수인 반면 '늙은 여자'는 복수 '여자들'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썼을까? 아무리 늙은 여자라도 한 명의 여자를 특별히 어머니로 대하는 것에 대한 경계일까? '젊은 여자' 역시 복수이다. 이성에 대해서는 어머니와 자매에 대하듯 온전히 깨끗함을 요구한다.
과부에 대해서는 진짜 과부를 존대하라고 3절은 말씀하는데, '진짜 과부'에 대한 자격은 4,5,9,10절에 나온다. 그런데 '존대하라'는 단어 '티마오'는 '귀하게 여기다, 가치있다, 존경하다'의 의미인데, 디모데 자신의 이름과 어원이 같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대하다' 라는 이름을 가진 디모데에게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씀한다. 섬기는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듯 모든 이들을 섬긴다.
과부는 말 그대로 남편을 잃은 여자들인데, 그들의 노후에 대해 먼저 그들의 자녀나 손자(혹은 자손)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효'라고 번역된 단어는 '유세베오'로서 '경건'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즉 '효'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한다.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것 없이는 효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것은 '배워야' 한다. 경건은 연습하고 배우는 것이다.
5절은 '참 과부'는 '외로운 자'임을 말하는데, 그래서 4절 같이 자녀나 자손이 있는 자들은 엄밀히 말해 참 과부는 아니다. '외로움' 즉 '혼자된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참 가족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 육적인 가족을 잃어 홀로된 이들이다. 그런데 '외로움'이 어떤 면으로 경건 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외롭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잃었을지라도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서 향락을 즐기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한다 (6절).
디모데는 이러한 것을 명할 의무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과부들이 책망받지 않기 위해서다 (7절). 디모데가 명하지 않으면 그 책망은 디모데에게 간다. '명하여' 역시 '파랑겔레'이다.
8절에서 바울은 좀 쇼킹한 말씀을 하는데,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한다. '돌보다'의 원어는 '프로노에오'로 '프로 (앞)'와 '노에오 (생각하다, 이해하다, 고려하다)'의 합성어로, '미리 생각하다, 공급하다, 돌보다'의 의미이다. 필요한 것 특히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많은 것에서 '미리 생각해'서 돌보는 것이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도 발란스가 좀 필요한데, 너무 모든 것에 대해 직접 대신해 주는 것은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게 하는 '믿음'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내가 젊었을 때, 내가 너희들 나이 때는 내가 다 알아서 했어'라며 그들을 그냥 '방목'하는 것이 과연 독립심을 키울 것인지, 아니면 혼란스러운 시간을 통과하게 할 것인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관심을 가지고 그 나이 때에 해야 할 것들을 잘 해내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필요한지 '프로노에오' 해야 한다. (이것 역시 실수를 통해 깨닫는다.)
이것은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 같다. 부부가 왕과 왕비 같아지려면 서로가 왕으로 혹은 왕비로서 대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프로노에오'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런 프로노에오가 따라오는데, 사랑이 식으면 '미리 생각함'이 없이 그냥 매사에 급급하게 처리하게 된다. 사랑 역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나.. 아무튼 이런 것이 없다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한다. 아.. 불신자들 조차 이런 '프로노에오'를 살아내는 이들이 있는데, 믿음의 가정 특히 가장들에게 이런 것이 없다면 문제다.
9절의 과부의 '명부'를 말한 것을 보면 초기 교회는 나이들어 살기 막막해진 사람들에 대한 노후와 어떤 면의 사회보장제도를 실행한 것 같다. 근대에 사회보장제도가 시작되기 전에는 어차피 가족이 노후를 책임져 왔는데, 교회는 공동체로서 '확장된 가족'으로서 이러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과부'의 자격이 만만치 않다. 나이가 60 이상 이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 전에는 스스로 힘든 일이라도 해서 벌어먹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과부 역시 '외롭고' 힘들지만, 그들이 교회 공동체에게 물질적으로 짐이 되는 것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더우기 '한 남편의 아내'여야 했고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여야 했다. 이러한 기준은 과부 구제에 대한 기준이기도 했지만, 여자들이 추후 혹시 과부가 되더라도 교회 공동체 혹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돌보심을 보게 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젊은 과부에 대해서는 '정욕'을 언급하는데, 원어 '카타스트레니아오'는 '카타 (아래로, 아래에서, 통하여, ~으로 등)'와 '스트레니아오 (사치스럽다)'의 합성어인데, 이 단어 역시 딤전에만 등장한다. 그런데 묘한 '성욕'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젊은 여자나 젊은 남자에게 성욕은 암초같은 문제다. 특이한 것은 이 '성욕'의 문제와 '그리스도'가 서로 부딪히는 것으로 말한다. 이 문제는 결론이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정욕의 문제 때문이라도 결혼하라는 (고전 7:9) 권유를 했던 바울은 왜 유독 젊은 과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고전 7:38에서는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 말하며 7장 후반부에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 (7:40)'이라고 밝힌다. 바울은 결혼 문제에 대해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냥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의 젊은 과부에 대해서는 '과부 목록' 즉 교회 공동체가 물질적 도움을 주는 목록에 들게 하지 말라는 의미다. 과부가 되어 재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롬 7:3). 하지만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것에 있어서 과부는 그냥 지낼 것을 권유한다. 요즘처럼 수명도 길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받기 쉽지 않은 문제다.
아무튼 과부 목록에 들게 할 수 없는 이 젊은 과부들은 나이만 젊은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처음 믿음을 저버'림으로 정죄받은 이들이고 '게으르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쓸데 없는 말을 지껄이고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여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이들이다. 물론 젊다고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들은 목록에 올리지 말라는 의미겠다. 그래서 바울은 젊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살림하'기를 권한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바울'이 권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냥 바울의 의견으로 여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사단에 돌아간' 것은 아닌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6절은 원어로 '믿는 (남성)들이나 믿는 (여성)들에게 과부들이 있거든' 이다. 과부의 문제라고 여성들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함께 도울 문제다. 확장된 믿음의 가정에 대한 섬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주님, 세상이라는 과거 남편에 대해 죽은 우리들은 주님 앞에 참 과부임을 압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신부로서 기다리지만, 세상에서는 소망없는 과부인 우리들이 다른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만 섬기게 하소서. 진정 주님 안에 과부되어 의지할데 없는 여인들을 주께서 섬기시듯 우리가 섬기게 하소서. 그런 이들을 돌보고 또한 우리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마음과 지혜를 주소서. 디모데의 이름처럼 서로가 존귀하게 대할 수 있게 우리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