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장로는 다스리는 장로이고 목사는 소위 '가르치는 장로'라고 한다지만 '장로' '목사'를 구분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모두가 로만캐톨릭이었고, 거기에는 '신부'가 존재했다.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뿌리인 신학자 캘빈 (혹은 깔뱅) '목사'로 섬기기는 했지만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은 없었다. '목사, 교사 (혹은 박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을 제안했기 때문에 목사는 '설교' '성례전'을 맡고 '교사'가 말 그대로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그가 제네바 교회에서 사역할 때는 매년 두 개의 '카운실'에서 선택된 12명의 장로들과 6명의 목사들이 함께 사역했다. 요즘처럼 한 명의 '담임 목사'가 매주 설교하는 구조와는 달랐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현실적인 면에 부딪히다보니 풀타임으로 목회에 전념하는 '담임 목사 제도'가 생긴 것 같다.

오늘 말씀 17절은 이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데,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다스림' '가르침'이 함께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로는 그 기능에서 3장에서 '감독'으로 표현되며 이미 '가르치기를 잘하 (3:2)'는 것이 그 자격이었다. '다스린다'는 말이 전에 나눴던 것 처럼 '살펴서 필요를 채운다'는 의미이기에 장로들은 '사람들의 상태를 잘 살펴서 필요한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을 해야했고, 그러한 일을 잘 하는 장로들을 배나 더 존경할자로 알라고 말씀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수고를 하는 장로들에 대한 '사례'를 암시하는 구절이 따른다. '집사'로 인정받고 섬기는 이들에 대해서도 사례에 대한 암시를 한 것 같은데, 섬긴다고 모두 다 사례를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 사례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그 비유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한 것이다.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즉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서 '거룩한 자'가 받을만한 어떤 대단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먹는 것'을 해결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여기 '일꾼' '집사'가 아니라 그냥 '일하는 자'이다. 즉 일반 노동자가 그 하는 일에 대해 받는 삯을 말한다. 물론 시대가 바뀌어 이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일 수 있지만, 그 기본 원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내용이 고전 9:9에도 나오는데,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 말씀하고 이어서 10절에는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즉 사례의 정당성을 말씀하는데, 조금 더 나아가 12절에는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라고 하며 바울과 또 그와 함께한 사역자 몇은 아예 사례를 받지 않음을 말씀한다. 사례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것이 민감한 문제가 될 때는 사례 조차 '더러운 이 (3:8)'가 되거나 혹은 '돈을 사랑 (3:3)'하게 되는 경우로, 복음 사역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절은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을 말씀하는데, 이것은 장로에 대한 특권이라기 보다는 이제까지 계속 언급한 '권위' '질서'의 문제이다. 장로는 다스리고 가르쳐야 하는데, 만일 아무나 어느 때든지 와서 장로에 대해 비판하거나 거짓으로 꾸며대면 질서가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 18:15-17 말씀처럼 반대로 교회의 일반 형제들이 죄를 범했을 경우에 대한 해결도 쉽지 않은, 아니 사실은 매우 힘든 것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 잘잘못을 가려야 하는 때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비방하고 송사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다. 더우기 이를 위해 세상의 법정을 끌어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말씀한다 (고전 6:5-6). 세상의 법 위에 있는 하늘의 법을 오히려 세상 아래 놓으려는 부끄러운 짓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20절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는데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는 다른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마태복음의 말씀은 '형제가 '너에게' 범죄하였을 때(원어)'이고, 여기 20절은 (아마도 교리적인 죄 혹은 죄악이 확실히 드러난) 범죄자에 대한 경계를 말씀한다. 그런데 이 '꾸짖다'의 원어인 '엘렉코'는 그냥 비난하거나 정죄한다는 말이 아니라 '드러내다, 바로잡다, 설명하게 하다' 등의 뜻으로 그러한 범죄한 이들을 결국은 바로 세우기 위해 '두려움'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디모데에게 '편견이 없이' 그리고 '불공평하게 하지 말'라고 '엄히 명'한다. '편견'이라는 단어는 '선입견'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하기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한다. 교회의 궁극적인 리더는 주님이시고, 주님에게는 한 영혼 한 영혼이 모두 중하고 사랑스럽다.

22절은 다시 '안수'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데, '아무에게나 경솔히' 하지 말라고 한다. '경솔히'라는 단어는 '성급하다'의 의미인데, 시간을 걸려 충분히 검증되면 안수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나에게는 될 수 있으면 안수하지 말라는 얘기로 들린다.) 안수는 '동일화'로 섬기는 이들을 세우는 일이기에, 한번 안수하면 물를 수도 없고, 만약 잘못된 이에게 안수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에 큰 해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23절은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한다. 디모데가 가진 병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바울은 포도주를 약으로 처방한다. 아마도 디모데는 어떤면으로 금욕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술이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 정확한 것은 이런 모든 권유를 하면서 바울은 디모데의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사랑의 관심을 보인다. 한 교회는 한 개인으로 시작되고 특히 리더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24-25절은 죄 혹은 선행이 밝히 드러나거나 혹은 그 뒤를 따른다고 하는데, 교회 생활 안에서는 감추인 것이 없이 죄는 죄로 드러나고 선행은 선행대로 드러날 것을 말씀한다. 시간의 문제이지 숨겨질 것은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딤전을 묵상하며 공부하다가 갑자기 의문이 든다. 바울은 로마서와 고전 고후까지 그리고 갈라디아서 역시 영 혹은 성령을 많이 언급하고, 에베소서 역시 영에 대해 말씀하는데, 빌립보서, 골로새서에서 조금, 살전에서 조금, 살후에서 한 두번 언급하다가, 이제 딤전에서는 3:16 그리고 4:1 외에는 거의 성령 혹은 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제 ''이나 '성령'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진걸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딤전에 나온 여러 말씀들들이 다만 현실에서 처세를 위한 종교적인 내용들이라면 영이 필요없지만 믿음과 경건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 등에 대한 언급은 영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때가 악하고 영에 대한 개념이 혼잡해져서 상대적으로 영에 대한 언급이 적어진 것 같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임). 분명한 것은 성령 혹은 영은 어떤 기이한 현상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영이요 생명'이다 ( 6:63). 마찬가지로 바울은 딤전에서 영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 안에서 (원어) 우리에게 말씀하 ( 1:2)'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안에서 바울을 통해 그 영으로 말씀한 것이된다. 영으로 받으면 이 모든 내용은 단순히 권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이요 생명이 된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임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통해 우리가 그 안의 영을 만지기 원합니다. 현실을 단지 그냥 현실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게 하시고, 또한 영적인 것들을 그냥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이 시간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실질적인 도우심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 세우시고 선물로 주신 귀한 이들을 지키시고 복주시며 영육간에 강건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