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둘로스) '멍에 아래 있는 자들'이다. 멍에는 어떤 면으로 법적인 묶임이고, 그들의 주인과의 관계이다. '상전' '주인'이라는 말인데, '우리 주 예수' 라는 말의 ''는 신약에 748번이나 나오는 '쿠리오'지만 여기는 '데포테스'라는 단어로 신약에서는 10번 정도로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은 말이다. 유다서 1:4에는 '유일하신 주 (데포테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이라고 하여 '데포테스' '쿠리오' 모두 함께 사용되었다.

'쿠리오'는 매우 광범위한 관계 속에서 쓰일 수 있는 말로, 여러 계층속에서의 '' 혹은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주의 주'라고도 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데포테스'는 오로지 절대적 '주종' 관계에서만 쓰이는 말이다. 그래서 '노예'의 주인에 대한 '전적복종'의 의미가 '쿠리오'보다 훨씬 강한 말이다.

그래서 (상전이 어떠하든) '모든 것에 대해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 즉 다시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살다보니 좋은 위치를 얻는 방법 중 매우 흔한 것이 '실력'보다는 '네트워크' 혹은 '연줄'이고 '충성'임을 본다. '줄을 잘서는' 문제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있지만, 그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상전들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 즉 자신들에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실력보다는 '은혜'. 물론 실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것은 소위 '낙하산 인사'로 비난 받을 것이지만, '믿음'의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다시 '권위'의 원리임을 본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문제가 특히 ''으로서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믿는 상전'이 있으면 좋겠는데 (2), 기본적으로 이 믿음의 데포테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된 형제로 여겨 종들도 형제로 대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 이해 때문에 혹시라도 종들이 '형제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우선 '믿기 때문이라도' 더욱 잘 섬기며, 또한 그들은 (같은 형제들로서) '사랑받'는 이들임을 말씀한다.

재미있는 것은 '상전'의 자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우선 상전들이 '형제'임을 말씀하고, '유익을 받는 자들'이라고 하는데, '유익'은 문자적으로 '좋은 일''을 말한다.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어차피 종들이 일함으로 그들이 돈을 챙겨도 그들은 믿는 이들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라는 느낌을 받지만, '받는'이라는 단어는 좀 특이한 '안티람바노'라는 단어인데, '안티 (대적, 혹은 대신)' '람바노 (취하다)'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무언가 기초를 세우다, 굳건히 세우다, 쥐다, 잡다, 돕다, 함께 누리다, (종들의 섬김의 결과에 참예하다)'등의 뜻이 있다. 즉 상전은 일꾼들의 노동을 '착취 (람바노)'하는 것이 아니라 (안티), 그 노동의 결과를 '함께 누려야 (안티람바노)' 한다. 아무리 기독교 기업이라도 믿음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 어떤 노동착취가 있다면 '안티람바노'가 아니라 그냥 '람바노'로 끝난다. 오히려 상전은 그들의 위치를 섬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디모데는 종들에게 (그리고 상전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파라클레이' 해야 한다.

3절은 다시 '경건, 유세베이아'를 말씀하는데, '주 그리스도' '경건'이 함께 감을 볼 수 있다. 이를 따르지 않을 때 4-5절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더우기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게 될 정도로 타락하는데, '교세'를 등에 업고 파벌 싸움을 즐겨하고, 자신들과 조금 다르면 '이단 사냥'을 하고, 바리새인들 처럼 돈을 사랑한다. 따지고 보면 '' '' '물질' 등이 모든 것의 문제 같아 보이는데,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단정한다 (10). 돈과 물질은 필요하지만, 돈을 '사랑 (필레오)'하는 것이 문제다. 돈은 '아가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잘못되면 필레오 하는 (애절히도 아끼는) 것이다. 이 역시 마음의 문제고 궁극적으로는 영적 문제다.

5절에서 나온 단어 '이익' 6절에도 동일하게 나오는데, '자족과 함께 (라면) 경건은 위대한 이익'이라고 말씀한다. 자족이 어떻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영원'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한 개인에게는 고작 몇 십년 혹은 자손에게 가도 그것이 얼마나 갈지, 다른 누구에게 갈지도 모른다. 결국 7절 처럼 '공수래공수거'.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만족' '자족' '자신(아우투)에 만족하다'와 같은 단어로 '만족하다'의 의미지만, 이 원어 '아르케오'의 원래 의미는 '끊임없는 힘에 소유되다, 강하다, 충분하다' 등의 의미이다. 없어도 만족하려고 눈물겹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며 누리는 것이다. 이는 시편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는 고백과 동일하다. 다함이 없는 힘을 소유하려면 다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모든 말씀이 당시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많던 시기에나 적용되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금은 맞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부한 자들 (17)'이 있었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부자들도 있지만, 동시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 (우리)에게 있 ( 26:11)'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본주의와는 많은 거리를 두는 것 같다. '은행' '이자'도 존재하지만, 자본을 축적하거나 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또 아니다. 주 그리스도를 모시며 그 분 안에서 교회로서 나누며 유기적인 교통이 있음을 말씀한다. 그래서 어느 사회서든 경건과 자족은 가능하다.

주님, 열심히 일하며 투자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것 보다는 그 목적을 돌아볼 수 있는 안목을 주소서. 정말 경건을 위해서 자족할 수 있게 하시되, 주님의 그 한량없으신 공급하심을 인해 기쁨으로 하게 하소서. 엘샤다이 이신 주님, '나는 ~이다'의 여호와, '에고 에이미'의 그리스도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게 하소서. 교회 안에서 나누는 일들이 더욱 풍성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