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의 원어에서는 ‘그러나 오 그대 하나님의 사람이여!’ 라고 하는데, 바울은 디모데를 부르며 ‘오’라는 감탄사를 쓴다. 바울이 감탄사를 쓴 것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디모데서 정도인데, 그 중 이번 딤전 6장에만 두 번이나 (20절), 더우기 디모데 한 개인에 대해 쓰고 있다. 이제까지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던 디모데에게 바울의 마음은 ‘오’로 드러난다. 정말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했고 그를 높이고 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데, 딤후 3:17에도 나오지만 거기에는 원어로 순서가 ‘그-그-하나님-사람’으로 되어 있다. 즉 일반적인 성도들을 의미하지만, 여기 6장 11절에서는 ‘사람’ 이 더 부각된다. 즉 디모데를 가리킨다. 귀한 주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디모데는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먼저 ‘이것들을 피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들은’ 문맥상 지난 4, 5, 10절 등 같이 들리는데, 특히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돈 사랑’은 단수지만, ‘탐내는’은 복수격 동사인데, ‘피하다’와 대조가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절에 ‘따르라’는 동사도 있고 인칭도 다르지만, 원래 장절이 나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반드시 ‘피하다’가 ‘따르다’와만 대조될 필요는 없다. 뒤에도 많은 동사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피하고 있어야 하고, 대신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아가페)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고 있어야 한다.
12절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는데, ‘싸움’ 혹은 ‘전투’의 의미도 있지만, 그 원의미는 ‘모임’이고, 특히 운동 경기에서 ‘경주’를 의미한다. 즉 ‘막싸움’이라기 보다는 정해진 룰 안에서 ‘이상적인 경주’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을 추구한다고 불법을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 (마 7:23). 또한 ‘영생을 취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영생을 위해 디모데가 ‘또한 부르심을 받는다’. 디모데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사역은 영생을 위한 것이다. 또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고백하’는데, 13절에는 주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 즉 같은 고백을 하셨다고 한다. 즉 이 둘의 고백은 진리이고 영생이다. 그리고 ‘만물을 살리시는’ 역사가 있다.
14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하는데, 이제까지 여러 명령들 (파랑겔레)이 있었지만 ‘이 명령’은 단수이다. 여러 가지 명령들이 있더라도 그 명령은 하나다.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니고 그 안에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이어진다. 피할 것들은 ‘이것들’이지만 명령은 하나이고 ‘영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진다.
‘기약’ 즉 ‘카이로스’가 되면 그가 보이시는데, ‘행복하고 유일하게 능하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다 (15절). ‘만왕’ 혹은 ‘만주’라는 단어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형 명사격 (혹은 명사형 동사격?) 인데, 즉 ‘왕이라고 하는 이들’ 혹은 ‘주라고 하는 이들’이다. 세상에는 많은 왕이나 주가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왕 혹은 주라고 할 뿐, 정관사 ‘호’가 붙는 그들의 참된 왕, 참된 주는 그리스도시다. 15절 원어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는데, 그래서 자연히 16절의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가 ‘하나님’ 혹은 ‘호 떼오스’만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함을 암시하는 것 같다. 즉 전에는 하나님 ‘호 떼오스’만 16절의 속성이 있었는데, 14절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계시한다. 물론 예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으로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되신 분이지만 (요1 1:1), 승천하신 주님의 모습은 이제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가 되신다. (그런데 스데반이 생각난다. 좀 더 고민해야할 문제같다. 아무튼 다만 그가 나타나실 때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7-18절은 다시 부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라고 하는데,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계심에도 부자들은 그 부의 능력으로 자신들을 왕과 주로 세우기 때문이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말씀 하는데, ‘후히’라는 말은 ‘부한’과 동일어이다. 부한 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18절은 부자들이 ‘선을 행하고 선한 일에 부하고 잘나누며 교제 (혹은 교통, 코이노니아, 재물을 나눔)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폭력이나 정치적 방법으로 부자들의 재물을 뺏어서 나누라는 의미가 아니라,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 (19절)’이라는 믿음의 시각을 갖게 함으로 가능함을 말씀한다. 여기 ‘장래’는 ‘임박한’ 혹은 ‘바야흐로’라는 의미이다. 즉 먼 장래가 아니라 곧 다가올 영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함없는 재물보다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
다시 20절은 ‘오, 디모데여’ 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부탁한다. 특히 ‘거짓된 지식 (거짓이름 그노시스)’을 말하는데, 소위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같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것이지만 결국 당시의 영지주의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지키고 피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결국은 ‘은혜’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은혜를 기원하며 마친다.
주님,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임을 봅니다. 이러한 명령들은 우리를 한 면으로 숨막히게 하지만, 한량없이 공급하시는 유일한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함이 되시며 은혜 안에서 이기게 하심을 믿습니다. 다른 교훈이나 다른 복음을 받거나 그 안에서 덧없는 쟁론을 그치고 오직 참 주인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붙잡게 하소서.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충만하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며 깊은 누림과 교제가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