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다.  딤전은 주후 65년에 디도서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다.  그래서 딤전과 디도서는 내용이 비슷한 것이 많다.  그리고 2년 후인 주후 67년에 딤후가 쓰여졌다고 한다.  아마도 바울은 그렇게 디모데를 만나보고 싶어했지만 2년이나 만나지 못하고 이 편지를 썼고, 2번째 투옥된 후 얼마되지 않아 순교했다.  사실 디모데후서를 읽으면 기분이 착잡하다.  그렇게 주님을 다이나믹하게 만나고 그 후 죽기까지 주님과 그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바울의 말로가 순교였고, 더우기 많은 이들이 그를 떠나서 곁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1:15, 4:10-11).

 

결국 믿음이란 무엇인가 뒤돌아보게 한다.  잘먹고 잘살며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목적인 믿음 생활은 없다.  믿음 생활은 고난을 받는 생활인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궁극적으로는 고난을 감내하기 위해 있다 (8).

 

1절과 2절은 딤전의 1-2절과 비슷하다.  딤전에도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모두 원어로는 ‘테크노’로 ‘자녀’의 의미이다.  ‘아들’이 믿음직함을 나타내는 단어라면 ‘자녀’는 사랑스러움을 나타낸다.  그래서 영어로 kid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그렇게 큰 책임을 맡았다해도 사랑스러운 kid였다.  ‘사랑하는’은 ‘사랑받는’이 더 맞다.  즉 이것은 주어가 바울인지 아니면 하나님인지 불분명한 것이다.  디모데는 하나님과 바울에게 사랑받는 kid였다.

 

3절에는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이라는 말을 하는데,  아마도 당시 청년 디모데에게 많은 도전이 있었을텐데, 그 중 하나가 ‘예수의 도’가 신흥 종교 내지는 이단이라는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더우기 이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권위나 영향을 전처럼 끼치지 못하는 바울을 두고 구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생명의 약속(1)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난 후, 이 믿음의 도는 뿌리나 근거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조상적부터 청결한 양심으로 섬겨오던 것에 의한 것임을 말씀한다.

 

또한 5절은 이 신앙에 대해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에 근거한 뿌리있는 것임을 상기시키는데, 그래서 그러한 신앙 교육을 받은 디모데에게도 자연히 이어졌고, 그것은 ‘거짓 없는’ 것이었다.  ‘거짓 없는’이라는 말은 ‘안후포크리투’인데, ‘안(아님)’과 ‘후포크리투스 (외식)’의 합성어이다.  영어의 hypocrite의 어원인데, 어떤 이들은 믿음이 있어 보이지만 hypocrite같이 겉과 속이 다르다.  (나도 그런 면이 많을지도..)

 

아무튼 디모데는 이 때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안에 다시 불일듯 하나님의 은사 (카리스마)가 일기 원했다.    이 은사는 바울이 직접 디모데에게 안수함으로 디모데 안에 (현재) 있는 것인데, 다시 불 붙는 것이 필요했다.  1:11에도 은사를 언급하는데, 거기에는 은사를 ‘나눠 주는’ 것을 말하지만, ‘안수’에 관해서는 ‘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말씀한다.  복음의 은사는 나누는 것이지만, 안수에 관한 은사는 바울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있는’ 것이다.

 

이 은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불일듯 일어나야 하는것인데, 7절에는 그 은사가 무엇인지 말씀한다.  원어로는 ‘대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움 (소심한, 침체된) 의 영이 아닌 능력과 아가페와 절제 (혹은 정신차림)’이다.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부흥을 경험한 한국 교회는 침체기에 들어선지도 이미 오래되었다는 느낌이다.  요즘은 기독교와 소위 보수를 말하면 재수없는 것 같이 들리게 되어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옹호하지만, 제도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면도 나에게는 있고,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인 면에서도 내용에 따라 겹치는 양상이다) 이럴 때 일수록 주님은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그것으로 불일듯 하게 되기 원하신다.

 

이 은사의 불일듯 함의 목적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함이다.  이제 별로 인기 없어진 것은 참된 복음과 또 수감된 바울은 현실적으로 볼 때 부끄러울 수 있는 문제다.  교회들이 부흥하고 목회자들이 잘나갔을 때는 신학교가 넘쳐났지만, 이제는 목회자들이 배출되어도 예전같은 부흥(?)은 기대하기 힘들다.  사실 만에 하나 이런 부흥이나 인기를 위해 목회자가 되었다면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은 것이고 (딤전 6:5), 하나님의 능력은 없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기본 자세는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고난이다.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받는 고난에 대한 충분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가 사랑하는 이에게 ‘고생 좀 해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악의에 찬 명령이 아니라 고난에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결국은 성화된다.

 

재미있는 것은 앞의 명령은 모두 현재 진행형이었는데, 7절의 동사부터 특히 여기 명령어는 모두 아오리스트 시제로 되어 있다.  7절의 ‘주심’과 8절의 ‘부끄러워 하지 않음’ 그리고 ‘함께 고난받음’과 다음 9절의 ‘구원하심’ 모두 아오리스트 즉 과거나 현재 혹은 한번이 아니라 시제를 초월한 삶 전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고난받음’은 원어로 ‘숭카코파떼오’라는 말인데, ‘순’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카코파떼오’는 ‘악한 것을 감내해냄’의 의미이다.  ‘복음과 함께’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현재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바울, 그리고 이미 고난을 감당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개인적으로 감내해야 할 때가 많지만, 그 고통의 시간은 항상 주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함께 고난받는’ 시간이다.

 

주님, 고난의 시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 영적으로 혹은 여러 상황적으로 침체된 시간은 되도록이면 피하기 원하지만, 이러한 시간이 내게는 큰 유익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주님과 진정 깊은 교제의 기회이고, 주님의 고난을 함께 이해하며 배우는 시간이고, 조금 더 주님을 얻고 닮아갈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게 하소서.  주께서 내 안에 두신 영은 침체의 영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박차고 일어나 복음을 선포하며 고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