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부르심이 우리의 행함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통하여 됨을 말씀한다. 

 

오늘 말씀 범위에는 시제가 다양하게 나오는데, 아오리스트 (부정시제), 완료형, 현재 진행 등이 나온다.  이 구절은 아오리스트로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부름받았다는 과거나 완료가 아니다.  영어번역들도 그렇고 한국어 번역들도 부정시제를 과거나 완료 등으로 많이 번역했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은 우리의 행함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 ()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전 즉 ‘영원 전 (크로노스 세대들 전)’에 이미 정해졌다.  여기에서 ‘구원하다’ ‘부르다’ ‘주신’ 모두가 부정시제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절대 주권을 말씀한다.  하지만 구원받고 부름받은 후의 삶에서 행함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데, 뒤의 구절의 현재진행형 동사가 말해준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는데, ‘나타나다’ 역시 부정시제이며, 앞의 ‘나타나심’과는 조금 다른 단어지만 둘 다 ‘빛’과 관계가 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고, 우리를 빛 비추신다.  그리고 ‘과연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부정시제)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부정시제, 역시 빛 ‘phos’와 연관 단어).  바울은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 부정시제를 쓰며 이러한 주님의 이루심은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 시간에 대한 개념을 뛰어넘어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밝힌다 ().

 

11절은 ‘이방인에 대한’이라는 말이 원어에는 있다.  ‘세우심을 입었다’ 역시 부정시제로서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12절의 시제를 살펴본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러한 것들에 대해 ‘고난을 겪되’ (현재 진행형 능동태)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현재 진행, 이태동사) 은 내가 ‘믿는’ (완료, 능동태) 자를 내가 알고 (완료, 능동태)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지키다’는 아오리스트, ‘이다’는 현재) 줄을 ‘확신함’ (완료, 수동태)이라” 

 

헬라어나 라틴어 동사에 특이하게 존재하는 것 중 하나가 '이태동사 deponent'라고 하는 것인데, 동사의 형태는 수동이지만 뜻은 능동인 동사이다.  ‘부끄러워하다’가 이에 해당하는데, 그래서 형태는 ‘부끄러움을 당하다’ 이다.  ‘고난을 겪고’ ‘믿고’ ‘알고’ 하는 동사는 모두 능동태이지만, 주님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당하지 않음은 물론 주님께서 당하지 않게 하신다. 

재미있는 것은 ‘확신하다’가 수동태인데, 원어로는 ‘설득당하다’이다.  이러한 확신은 내가 혼자 만들어 내는, 혹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충분히 빛 비추셔서, 설득당함으로 확신할 수 밖에 없기에 수동태가 된다.  바로 이 구절이 ‘아 하나님의 은혜로의 후렴 부분 가사가 되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But "I know whom I have be-liev-ed,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and am per-suad-ed that He is a-ble    늘 돌보아 주실 것을   To keep that which I've com-mit-ted   나는 확실히 아네   Un-to Him a-gainst that day."

 

전에 이 찬송을 영어로 부르며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내가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설득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 설득당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지도 않고 또한 이러한 확신을 설득 당했기에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명한다 (13-14).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는 것에 대한 동사는 ‘소유하다’의 현재 진행형 즉 ‘본을 소유하고 있으라’ 인데, ‘너에게 의탁된 이상적인 (칼로스) 것들을 지키라’는 명령은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둘 다 명령형 동사인데 왜 시제가 다를까?  그것은 ‘거하시는 성령’의 ‘거하다’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열심과 충성을 명하지만, 디모데의 능력이나 힘으로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으로 가능함을 밝힌다.  바울이 평생 지켰던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디모데가 지킬 수 있는 것은 바울과 디모데 모두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내주하고 계시지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울을 버렸다 (15).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바울을 버릴 때, 아무리 종교적인 모습을 가졌다해도 이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된다. 

 

반대로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자주 격려해 주고’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고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했다 (16-18).  오네시보로라는 이름은 빌레몬서의 오네시모와 비슷한, 즉 ‘쓸모있는’ 혹은 ‘유익한’ 을 의미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종이나 하인이었던 것 같다.  자신을 종으로 알고 섬기는 이들은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는다 (18).

 

주님, 믿음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또 구원은 나의 확신이 먼저가 아님을 배웁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과 믿음으로 나를 설득하셨습니다.  또 그 날을 볼 때까지 내가 헌신할 수 있도록 설득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보살핌이 있기에, 또 성령께서 내 안에 집을 만드시기에, 저는 귀한 것을 지킬 수 있고 또 섬길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