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인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참다’라는 말이 있다 (10, 12).  그래서 생명의 삶 해설에는 인내를 말하고 있다.  로마서 5:3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말씀처럼 어려움과 고난이 없으면 당연히 인내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고난은 인내를 이룬다.  인내는 구원의 도구이다’ 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 안에서 능력 부여 받음이 필요하다 (1).

 

1절의 ‘강하고’는 원어로 ‘엔두나무’ 즉 ‘능력을 받으라 (수동태)’는 의미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신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그의 타락으로 권세도 능력도 인위적인 것으로 퇴보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우리에게 참된 능력을 부여하시는데, 그 능력은 고난을 위해 있다 (3, 9).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기뻐하실까?  만일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을 은근히 즐기시는 주님이라면 고약한 분이실 것이다.  그런데 고난에 대해 주님 자신도 피하지 않으시고 그 밑으로 들어가셨다.  26:53에서 주님께서 잡히실 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고 말씀하신 것 처럼 분명 그의 능력으로 상황을 피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셨다.  그 이유를 히 5:8-9에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이라고 말씀하는데 고난과 순종과 온전함이 함께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는데, ‘고난 받다’의 원어 ‘카코파떼오’는 ‘악한 것 (카코스)을 감내하다’ 라는 의미로 능동형의 명령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적인 병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병사들이 전쟁할 때는 항상 복종함으로 능동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어에는 ‘나와 함께’라는 부분은 없다) 

 

4절은 ‘군사로 복무하는 자는 아무도 자신의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데, ‘군사로 복무하다’는 말이 단지 군인으로 '생활'한다는 말처럼 들려서 그리 다이나믹한 느낌을 주지 않지만 원어에는 ‘전쟁을 하다’ 즉 직접 전쟁터에서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다.  군복입고 여유롭게 막사를 돌아다닌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칼과 화살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활에 얽매’일 수는 없는데, 이 말은 ‘삶의 비즈니스, 비우 프라그마테이아이스’ 이다.  ‘프라그마테이아’라는 단어도 성경에 여기 단 한번 나오는 말인데, ‘비즈니스, 생업, 직업’ 등의 의미이다.  즉 ‘사생활’이나 ‘개인 생업’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바로 ‘군사로 복무하는 자’ 즉 전쟁터에 내몰린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이다.

 

즉 이 말은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은혜를 누리는 생명이 풍성한 삶인 것과 동시에, 영적 현실에서는 전쟁터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이런 말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병사로 모집’되었음을 아는 사람이다.  더우기 그 모집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이들이다.  바로 ‘충성된 (2)’ 이들이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은 모두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지금은 소위 ‘평신도’라도 언젠가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평범하게 일반적인 삶을 사는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충성’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미쁘다’로 번역된 단어 모두 ‘믿다’ 즉 ‘피스토스’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은 충성해야 하며, 현실을 보면 우리에게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즉 별로 충성스러운 것이 없지만 (13), 지난 딤전 1:12 말씀처럼,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신다.

 

단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사생활에 ‘얽매이는’ 것이다.  ‘엠플레코’ 라는 이 단어는 ‘실이 엉키다' 라는 의미이다.  즉 병사로 모집된 이들은 전쟁을 해야 하는데, 개인적인 것들로 엉켜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우선순위를 말씀한다.  병사들도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은 해야 하지만, 싸움에 임해서는 싸워 이기는 것이 우선이기에 잠시 먹는 것과 자는 것과 입는 것 등을 미룰 수도 있다.  충성된 이들은 우선순위를 아는 이들이다.

 

이들은 싸울 때도 룰 대로 싸운다.  5절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는데, 마라톤을 하다가 중간에 차를 타고 간다면 실격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믿음의 여정에는 지름길이 없다.  단지 좁은 문 좁은 길을 시간을 걸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며 싸우며 가는 길이다.  세상에도 기본적인 법과 룰이 있어서 아무리 부자라도 돈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군사들은 얼마나 큰 충성과 순종과 준법이 필요한가.

 

9절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여기의 ‘고난을 받다’는 능동태 현재 진행형이다.  즉 지금 자원해서 묶임으로 고난을 받고 있다 라는 뜻인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을 소위 ‘옥중서신’이라고 부르지만, 딤후 역시 감옥에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얼마 안 있어 순교를 예상하고 쓰는 이 마지막 바울 서신은 아마도 그에게 유서같은 것이었겠다.  자신은 묶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임을 당해오지 않았다’.

 

10절은 ‘구원’이라는 것이 한번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영단번에 구속을 이루셨고, 주님을 영접하는 이들은 한 번 거듭남으로 구원받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보장되어 맘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 ‘참음’이 요구된다.

 

‘참다, 후포메노’는 ‘지체하다’의 의미인데, ‘옆’ 혹은 ‘밑’을 의미하는 ‘후포’와 ‘있다, 거하다, 계속하다, 기다리다’의 의미인 ‘메노스’의 합성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천사들을 명하여 묶임에서 풀릴 수도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고 지체했다.  그 이유는 택함 받은 자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즉 택함 받은 자들 역시 묶임을 통과해야 함을 암시하며 바울은 그 본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미쁘다’로 시작하는 11절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라고 한다.  ‘죽었으면’의 시제는 부정시제이고, ‘살 것’은 미래형이다.  즉 죽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매일 십자가를 지며 죽음에 넘기움을 받아야 하는 문제다 (고후 4:11). 

 

죽는 것은 부정시제인데 비해 12절의 ‘참으면’은 현재 진행형인데, 한번 죽으면 끝나는 '느낌'보다는 계속 지금 고난을 '참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임을 말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대가는 ‘함께 왕노릇’ 하게 되는 것이다.  ‘왕노릇’은 ‘다스림’인데, 성경에서 ‘다스림’을 말하는 단어는 많은 경우 ‘섬김’을 의미하지만, 여기의 ‘숨바실루소멘’은 ‘바실레이아’ 즉 ‘왕국’의 왕으로서 정말 정치적인 다스림이고 또한 ‘권력’을 의미하며 ‘조정 control’도 포함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항상 사랑과 위로가 넘친다고만 생각하면 반만 아는 것이다.  앞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을 것인데, 주님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고 ( 19:15), 믿는 이들 역시 주님처럼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것이다 ( 2:27, 12:5).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주님께서 온전히 믿으실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보면 실패가 가득하고 충성됨이 없지만, 주님은 미쁘시기에 충성하고 그 고난을 닮아 참을 수 있다.

 

주님, 새해 들어 큐티 나눔을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하기를 원했지만 말씀을 따르다 보니 고난을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라고 해서 고난을 피하려 한다면 궁극적인 긍정인 인내함과 온전케 됨과 앞으로 주와 함께 다스림을 잃게 될 것을 깨닫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지상명령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아침에 주님 안에서 충성된 종이었던 바울의 유언을 또한 대면합니다.  병사로 모집된 것 조차 모르거나 혹은 잊었거나 혹은 신경쓰지 않고 있는 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여러 생활에서 개인적인 것에만 바쁜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과 함께 철장으로 다스릴 그 날을 위해 오늘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동행하며 싸우는 믿는 이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