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절은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 '말다툼'하는 이들이 있음을 말씀하는데, 15절에는 이들과 달리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한다. 말다툼에 빠지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17절에는 딤전 1:20에서 나온 '후메내오'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필레토'라는 이름도 등장하는데, 18절에는 이들이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고 돌아다녀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낙심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 바울을 개인적으로 대적한 것 보다는 '진리에 대해 벗어난 것'이다.

이들은 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을까? 교회 안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아마도 열심을 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도 갇히고 신앙인으로서의 삶도 녹록하지 않은 것을 보며, 더우기 믿는 이들은 영생한다고 하는데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아마도 부활의 역사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이해 뒤에는 (내 생각으로는) 그들의 삶 자체에 대한 기대가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고난과는 상반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메내오라는 이름의 뜻은 '결혼의 신'으로 헬라 신화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 에로스 (혹은 에로테스)가 모습을 바꾼 것 중에 하나다. 이 에로스는 그 외에도 많은 이름이 있는데, '안테로스 (돌아온 사랑)" "히메로스 (충동적인 사랑)" "헤딜로고스 (달콤한 말)" "헤르마프로디투스 (남성이지만 여성적인)" "포또스 (갈망)" "큐피드 (에로스의 어린 모습, 날개와 활이 있음)" 등이다 (위키피디아).

이러한 이름들은 전형적으로 '세상적인 사랑'을 말해준다. 특히 오늘 말씀의 후메내오는 결혼과 결혼 노래 그리고 잔치 등 화려한 것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이런 화려한 이름을 가진 자에게 14절의 '이 일을' 즉 앞의 여러 구절에서 말씀한 고난과 메임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등은 눈 앞에 부활이 보이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후메내오와 더불어 '빌레도'가 있는데, 그 이름 자체가 '사랑받다'라는 의미이다. 세상적인 사랑과 그러한 '사랑'을 받는 이가 함께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함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고 비관하게 만들어 결국은 쾌락주의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주의는 결국 거기에도 별 의미가 없다는 회의주의로 이끌어 망하게 한다.

이들은 망령되고 헛된 말들을 지껄이고 다녔는데, 이러한 말들은 '경건하지 아니함, 아세베이아스'이었다. 경건함과 말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믿는 이들은 말 조심을 해야 한다.

24절은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라고 하는데,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에 대해 대적하거나 다투지 말고 대신 가르치고 참으라고 한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에 빠져 결국 다툼이 되기 때문이다 (23). 이러한 이들에 대해서는 '온유함으로 훈계할' 것을 부탁하는데, '혹시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5-26). 헤딜로고스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만, 주의 종은 온유함으로 훈계한다.

주님, 세상이 주는 허무주의와 쾌락주의,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합니다. 거부할 수 있는 믿음 주소서. 부활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게 하소서. 오늘도 믿음 위에 서서 부활을 소망하며 행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