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에 고통하는 (위험한) 때가 이르는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를 '알라 (기노스코)'고 했다. 알고 준비해야 하며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그 때가 '위험한' 때인 이유는 2절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행태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인'들의 행태고 특히 '교회'라는 모임에 출석하는 이들, 즉 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면서 종교인 행사를 하지만 나타나는 모습은 '자기사랑, 돈사랑, 자랑, 교만, 비방, 부모거역 (부모에게 설득 혹은 수긍당하지 않음 즉 마음이 뻣뻣함), 감사치 않음, 거룩하지 않음, 무정함, 원통을 풀지 않는 (관제로 부어짐이 없는), 모함, 무절제, 사나움, 선함을 사랑함이 없음, 배신함, 조급함, 자만, 하나님사랑 대신 쾌락사랑 (쾌락의 여신 헤도네에서 유래)' 등이다. 여기 모든 단어가 '~하는 자들'의 의미이며, 다수의 단어가 '아님'을 의미하는 접두사 a를 썼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귀한 것들을 잃은 혹은 반하는 (a) 상태다. 결국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들이다. 디모데는 이러한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만일 내가 이렇다면? 회개해야 한다.)
'고통'당하는 때는 세상적인 고통이나 힘든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귀하고 본질적인 것들을 떠나 타락해서 모양만 남은 라오디게아 교회 같아 지는 것이 정말 고통이고 위험한 때이다.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 돈과 권력만 믿는 타락한 기독교의 모습이다.
6-7은 왜 이런 구절을 넣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이상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믿음을 떠나 모양만 남은 종교인들의 모습이다. 위의 종교인들의 거룩하지 못한 모습은 결국 성적 타락으로 나타나는데,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리를 잃고 경건을 떠난 종교인들의 말로는 쾌락추구이다.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발견한다 해도 알고 기억하며 행하고 있지 않으면 경건함을 잃는다. 이들은 (복수) 자신들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문자적으로는 '작은') 여자들을 (복수), 그것도 그들의 집안으로 들어가서, '사로잡아 죄들을 짊어지게 하여 여러 가지 정욕으로 끌려가게 하(킹제임스역)'는데, 결국 자신들이 타락할뿐 아니라 다른이들도 함께 타락하게 한다.
종교인들은 그 '모양'은 남아서 '항상 배우'지만,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진리의 지식'이라는 말은 '에피그노신 알레떼이아스'인데, '지식'으로 번역된 '에피그노시스'는 위 옆 앞 등등을 뜻하는 '에피'와 '지식'을 뜻하는 '기노스코'의 합성어이다. 그냥 '기노스코'라고 하지 않고 '에피'를 붙인 것은 궁극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의미한다. 즉 본질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이다. 머리로는 항상 배우지만 생활과 내적인 면에서 일치가 되지 않으면 생명이 되지 못하고 정보로만 끝난다. 그래서 상황을 만나면 영적인 결정보다는 육적이며 합리적(믿음에 근거하지 않음) 이고 세상적인 결정을 내린다.
8절에는 '얀네와 얌브레'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구약에 이러한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유대교 전설로는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사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술사 혹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그들도 모세가 행한 기적들을 따라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그들은 가짜였다.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 즉 이제는 더이상 믿지 않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짜인 것은 결국 드러난다 (9절).
그에 비해 바울이 가짜가 아닌 것은 10-11절의 여러 고통 가운데에도 믿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박해를 받는다 (12절). 박해를 통해 진짜와 가짜가 나뉜다. 슬픈 것은 한번 타락한 이들은 회개하기 정말 힘들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회복'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것이다 (13절).
하지만 '너'는 또 나는 배우는 것과 믿는 것 (부정시제) 안에 거해야 한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유아기 (혹은 모태)서 부터 성경을 인식해왔다.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안으로 지혜롭도록 능력을 준다 (14-15절).
모든 기록은 하나님의 숨쉬심으로써, 가르침과 폭로함과 바르게 함과 의로 훈련하는 것에 이롭다 (16절).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 즉 믿는 이들은 이러한 이유로 성경을 파고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온전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하려 하기 위함' 즉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디모데가 어려서 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알다'는 '에이도 (혹은 오이다)'로 '체험적으로 알다'라는 '기노스코'보다는 약한 '보다, 인식하다'의 의미이다. 하지만 '오이다' 없이는 '기노스코' 역시 없다. 그러니 종교인들은 얼마나 성경을 '오이다'도 하지 않을까.. 말씀을 '외어도' 그래도 살지 않는다면 말씀 그대로 인식하는 '오이다'가 없는 것이다...
주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살 수 있는 은혜 주소서. 이러한 것이 없는 것이 경건하지 않은 것이고 또 고통인 것을 배웁니다. 믿음으로 살려는 것은 박해를 동반하지만, 이러한 박해가 없는 것이 고통임을 깨닫게 하소서. 본질 없는 가짜가 되지 않기 원합니다. 종교인으로서 거룩한 흉내만 내고 모양만 있는 껍데기가 되지 않게 하소서. 나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타락시키고, 남들로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되지 않게 하소서. 과거 남을 실족케 했던 이러한 모든 죄들을 용서 하시고, 바울을 통해 이 시대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이 경고를 흘려 듣지 않게 하소서. 오늘 곳곳에서 믿음대로 살려는 하나님의 사람 각각을 돌보아 주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주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