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신경 중 일부가 된 구절이다.  주님을 믿는 것은 그가 나타나실 것과 당신의 왕국이 임함이 있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때이다.

 

2: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이름의 디모데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데, ‘때’의 원어는 ‘좋은 때 – 유 카이로스’ 혹은 ‘아닌 때 – 아 카이로스’이다.  즉 말씀을 전하기 좋은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을 떠나 항상 말씀을 전하고 선포할 것을 명한다.  이 동사의 시제 역시 아오리스트이다.  보통 명령은 현재 진행형을 쓰지만,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때와 상관없이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전도자의 일 (5)’이 된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씀하는데, ‘오래 참음’의 원어는 ‘마크로뚜미아’로 여러 번 나왔던 정욕 혹은 뜨거운 열정을 뜻하는 ‘에피뚜미아’에서 ‘감정’을 뜻하는 ‘뚜미아’와 시간적으로 매우 길다는 의미의 ‘마크로’의 합성어이다.  고전 13:4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동사)’와 같다.  주의 종의 큰 덕목 중에 하나가 오래 참는 것이다.  아주 오~~래 참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르치는 것이다.  오래 참으며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강압이나 위협 등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오래 참음을 수단으로 한다.  오래 참는 주의 종은 존경스럽다.

 

3: ‘사욕’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위의 ‘에피뚜미아’이다.  ‘열심’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되기도 하지만 ‘사적인’ 욕심에 대해서는 ‘욕심’ 혹은 ‘정욕’의 의미가 된다.  ‘스승을 많이 두고’ 에서 ‘많이 두고’의 원어는 ‘에피소류오’인데, ‘소류오’는 ‘쌓아두다’의 의미이다.  즉 한 명의 스승에서 바른 교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에 따라 이 스승 저 스승을 두고 자기가 편한 것만 취하는 행태를 말한다.  어떤 이들은 주님을 믿어도 점을 보러 다니고 그 외 다른 곳에서 진리나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결국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게 된다 (4).

 

5: 다른 이들은 그렇게 진리에서 돌이키더라도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해야 한다.  즉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야 하고, 악을 견디며, ‘복음전하는 자’의 일을 해야 하는데, ‘하다’의 원어는 ‘포에이오’로 매우 많은 의미를 갖지만, 그 중 하나는 ‘헌신’라는 의미도 있다.  즉 복음전하는 자의 일에 헌신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직무를 다’하는 것은 ‘그 안에 쌓인 (충만한) 모든 것으로 섬기라’는 의미이다.  공급하시는 성령님, 또는 성령님 자신의 공급하심과 충만하게 하심만이 복음전하는 자의 일과 섬기는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

 

 6: 개역에서는 ‘관제’로 번역했는데 개정역에서는 ‘전제’로 나왔다.  의미상 ‘관제’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왜 ‘전제’로 수정했는지 모르지만, 무덤에 소주를 따르는 것 같이 술을 '붓는' 제사 의식이다.  제물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번제 (burnt offering)와 같이 이 관제 혹은 전제는 drink offering으로 오직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보기에는 허비 혹은 낭비하는 것이다.  마치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만 온전히 드려지는 것이기에 낭비일 수 없다.  ‘내가 벌써 (혹은 이미) 부어지고 있다’라고 고백하는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온전히 부어지는 삶을 살았고, 이제 그의 생 마지막에 온전히 부어졌다.  그는 ‘떠날 시각이 가까웠’던 마지막까지 부어지고 있었다.  디모데 후서는 바로 이러한 부어짐이다.

 

7: 삶의 마지막에서 그는 승리를 고백한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고 얼마 후에는 순교를 당하지만 그의 삶을 통해 ‘선한 싸움을 싸워왔고,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켜왔’다.  ‘싸우다’의 시제는 이태 완료형이다.  즉 자신의 힘만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힘의 능력으로 싸워왔다.  이러한 힘으로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고 또 믿음을 지켜올 수 있었다.  나중에 이러한 고백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삶 속에서 계속 믿음의 선한 경주를 힘을 다해 경주하는 사람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8: 신앙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있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주어지는 상이 있다.  바로 ‘의의 면류관’인데,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시는 상이다.  ‘면류관’은 마라톤 경주에서 승리한 이들이 받는 월계관인데, 금으로 된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을지라도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것이다.  만인 앞에 높임과 인정을 받는 것인데, 황제가 주는 것으로 사실 황제나 왕족들이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아 그와 같이 성화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 즉 온전히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고, 그와 같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됐지만 (justified), 이 날은 이 의롭게 됨이 내적인 확신에서 온전히 외적으로도 드러나고 공인되는 때가 된다. 

 

주님, 마지막 까지 관제로 부어지는 삶을 산 바울과 그 본을 받아 의를 힘을 다해 추구하는 디모데의 삶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게 하소서.  편안과 안전함만 추구하지 말고 주님의 의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게 하소서.  주님 주시는 능력과 주님의 동행하심으로만 가능함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심을 믿고 오늘 주와 동행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