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디모데를 보기 원했던 바울은 9절에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하는데, 과연 둘은 후에 만났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
데마도, 그레스게도, 디도도 모두 떠나고 누가만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바울은 어떤 인간적인 아쉬움을 토로하거나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르지만,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말한 것은 단지 그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한 이유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두기고는 에베소에 ‘보내었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역을 마무리하는 즈음에 여러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필요 보다는 항상 사역을 먼저 생각했고, 그래서 두기고도 에베소에 보내야 했다.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라고 했는데, 원어는 ‘현 세대를 아가페 하여’이다. 요 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와 요일 2:15에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에서의 세상은 ‘코스모스’ 즉 ‘세상’ 혹은 ‘시스템’을 의미하지만, 여기에는 ‘현 세대’이다. 그런데 모두 ‘아가페’를 썼다. 하나님도 세상을 아가페 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하나님의 아가페는 타락한 ‘시스템’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심령들이라면, 데마가 아가페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아가페 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바로 현 세대 혹은 ‘이 세대 (막 8:12, 롬 12:2 등)’ 이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렸지만,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문맥상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해서 이들 역시 세상을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디도라면 딤전을 썼을 무렵 함께 편지를 보낸 ‘참 아들’인데, 디도가 만일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났다면 너무 비극적이다. 하지만 전설 상으로는 디도가 달마시아로 간 것은 파송된 것이었고 후에 그는 그레데로 돌아와서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레스게나 디도는 바울이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섬김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했기에 바울과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함께 남은 이는 누가 한 명인데, 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고 하며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한다. 원어에는 ‘나의 일’이 아니라 ‘사역을 위해 내게 유익하다’로 되어 있는데,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역’을 위함이다. 감옥에 갇혀 있어도 사역에 대한 그의 열정은 변함없었고, 마가가 그 일에 적격이었다.
그런데 마가라는 인물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바나바와 심히 싸우고 갈라지게 하는 이유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바울에게 마가는 사역에 함께 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사랑과 ‘위로 (권위자)’가 충만했던 바나바는 그의 조카 마가에게 사역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찌보면 바울에게 마가는 아픈 상처였을 수 있고, 초기 사역 사람을 쓰는 문제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했던 쓴뿌리였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마가는 성장했다. 그리고 그가 사역에 ‘유익’한 인물임을 인정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것이지만, 교회에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사역을 거스를 수 있는 문제다. 사역은 사람을 세우는 것, 덕을 세우는 것이다 (고전 14).
감옥에서 위로가 필요했던 바울은 두기고라는 인물도 가까이 두었으면 좋겠지만, 에베소에 필요한 인물이었기에 파송한다. 원어에는 1인칭 동사여서 바울이 파송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3절은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말하는데, 옆에 남아있던 누가가 겉옷을 따로 마련해 줄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아마도 누가에게도 신세지고 싶지 않아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자신이 두고 온 겉옷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 같다. 또 책은 파피루스 보다는 오래 갈 수 있는 가죽 종이 (양피지)에 쓴 성경을 가져오라고 부탁한다. 그가 읽기 원했던 성경이 어떤 책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도 많은 서신을 쓰고 성령 충만함으로 말씀을 전했던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시 로고스를 읽는 본을 보여준다. 배움이나 사역에 포기할 줄 모르는 주의 종이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는 인물이 바울에게 해를 입혔는데, 아마도 구리로 우상을 만들던 사람이었을까? 바울은 이렇게 자신에게 해를 많이 입힌 인물에 대해 복수 해달라고 하지 않고 다만 ‘너도 그를 주의하고 있으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해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복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주의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이들이다.
16절은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하는데, ‘변명’은 ‘아폴로기아’라는 단어로 법정 용어 ‘변론’을 의미하는데 영어 ‘apology (사과)’의 어원이다. 아마도 바울이 투옥될 때 그를 위해 변론한 자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많은 교우들이 있었을텐데 그와 함께 하며 그를 위해 변론한 이는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생각되지만, 요즘도 고난 받는 이들, 특히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 대해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많은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북한의 인권문제 특히 단지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받는 인간 이하의 대우에 대해 과연 한국 교회는 태극기 집회만큼 열을 내고 있는가? 과연 촛불 집회 만큼 자신들을 태우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모두가 떠나갔어도 주님은 바울 곁에 서서 능력을 주셨다 (17절).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셨는데,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이 때에도 주님은 그 곁에 서서 능력을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될 것을 믿었다. 바울은 묶였지만 오늘도 디모데 후서를 통해 모든 이방인들이 듣고 온전히 전파되어 충만하게 한다.
18절에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말하는데, 바울에게 있어 많은 경우 ‘하늘 (우라노)’은 신령한 것이지만 현실과 함께 가는 것으로 말했는데, 여기의 동사는 미래형이고 ‘하늘의 그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이제까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실행하던 바울은 곧 숨을 거두어 구원받아 ‘들어갈 (에이스)’ 곳을 하늘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종말에도 그는 소망을 잃지 않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록된 시간면에서 디모데 후서를 마지막으로 바울 서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지막까지도 바울은 주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며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부탁한다. 몇몇 형제들의 상황을 말하며 문의를 부탁한다. ‘주께서 그대의 영에 함께 (계시기를), 은혜가 그대들에게 (있기를) 아멘’ 으로 맺는다. 그의 서신은 이제 주가 함께하시는 영을 가진 우리, 은혜가 함께 하는 우리들을 통해 쓰여진다.
주님, 종말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함께 계시고, 죽어도 부활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임을 압니다. 종말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주를 섬기며 서로를 세우는 사역은 멈추지 않도록 주를 믿는 우리와 박해 받는 여러 형제들 곁에서 능력이 되소서. 지금도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섬기는 귀한 주의 종들에게 힘이 되시고 공급이 되소서. 형제들도 박해받는 자들과 함께 설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