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은 의사였던 누가가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관찰로 예수님의 행적, 특히 다른 복음서에 비해 주님의 인성을 많이 기록한 책이다.  누가는 마태 마가 요한 등 다른 복음서 저자들 처럼 주님의 12제자 중 하나는 아니었지만 ‘시초부터 모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한글킹제임스역 3)’ 자격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개역판 1-4이 원어와 좀 다른데, 한글킹제임스가 비교적 잘 번역되어서 인용해 보면,

( 1:1) 우리 가운데서 가장 확실히 믿게 되었던 일들의 실상에 관하여 정연하게 기록하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았으니

( 1:2) 그들이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들과 사역자들이었던 우리에게 전해 준 것처럼

( 1:3) 시초부터 모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정연하게 써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노라.

( 1:4) 이는 각하가 배우신 것들이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다.

 

개역은 마치 누가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3)’핌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 처럼 들리게 번역했다.  하지만 비록 예수님의 12제자에는 속하지 않았더라도 누가는 ‘확실히 믿’은 사람 중에 하나였고,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어제 말씀처럼 마지막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은 충성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복음서를 ‘데오빌로’에게 썼다고 밝히는데, 그의 호칭이 ‘각하’이다.  헬라어로 ‘크라티스토스’라는 이 단어는 3절 말씀과 누가가 후에 또 기록한 사도행전에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 호칭은 왕이나 로마시대의 고위 계급을 가진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황제에게는 아마도 ‘주’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래서 '시이저는 주시다!' 라고 사람들은 고백했는데, 대신 믿는 이들은 '예수는 주시다!' 라고 고백했다.

 

우선 ‘데오빌로’라는 인물이 궁금해 지는데, 많은 이들이 이는 실존인물이 아닐 것이라 보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시 ‘각하’라고 불릴만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주님에 대해 ‘배우’기란 힘들고 (원어는 가르침을 받다 즉 수동태로 되어있어 더욱 그렇다), 또 일개 의사가 이렇게 긴 내용을 ‘각하’에게 쓸만한 일도 흔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데오빌로’라는 이름 자체가 왕의 이름으로는 흔한 이름이 아닐 것 같은데, 말 그대로 하나님을 뜻하는 ‘떼오스’와 사랑을 뜻하는 ‘삘로스’의 합성어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혹은 ‘하나님께 사랑받는’의 의미이다.  ‘각하’로서 이러한 이름을 갖기는 쉽지 않고, 그래서 생각해 보니 누가는 가상인물을 놓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 동시에 ‘각하’의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 일반 믿는 형제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믿을 때 즉 하나님을 사랑할 때, 혹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족 (royal) 제사장’으로 삼으신다 (벧전 2:9).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왕’된 신분이다.  즉 ‘크라티스토스’이다.  단지 참 ‘황제’이신 주님만 ‘주’ 되신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사가랴’라는 제사장과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라는 인물들을 처음 등장시킨다.  사가랴는 ‘아비야의 반열’이지만 엘리사벳에 대해서는 ‘아론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한글 킹제임스역에서는 ‘그의 아내는 아론의 딸들 중 하나로’ 라고 번역했고, 원어에서는 ‘아론의 딸들로부터 나왔다’ 라고 되어 있다.  성경의 족보에서 ‘딸들로부터 나왔다’라는 식으로 기록한 것은 잘 보지 못했다.  물론 아론의 처음 딸들의 ‘모계 족보 (이런 것은 있지도 않겠지만)’를 통해 그 딸들의 딸이라는 의미 보다는 아론의 계보를 통한 그 자손이라는 의미겠지만, 누가는 이런 표현을 쓴다. 

 

아무튼 요한과 마찬가지로 주님보다 침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해 먼저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예언에 따라 ‘엘리야가 먼저 와야 ( 17:11)’ 하기 때문이고, 침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오는 사람이라고 천사가 말하기 때문이다 (17). 

 

당시 제사장이었던 사가랴가 그의 “직무를 행”했는데, 그 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말한다.  아마도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한번도 어떤 천사의 나타남이나 이적이 없다가 (적어도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이러한 일이 생긴 것 같다.  사가랴는 이러한 천사의 나타남에 ‘놀라며 무서워’했는데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주님의 지시를 위해 산기도를 간 것도 아니고 금식을 한 것도 아니며 단지 그의 직무를 평상시처럼 행하며 기도하며 ‘의롭게’ 살았다.  의로운 생활을 함에도 자식이 없었는데 드디어 천사가 와서 아내가 아이를 가질 것 뿐만 아니라, 이름도 요한이라 정해주고, 더우기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15-17)’고 전한다. 

 

주님, 말씀을 접할 때 마다 데오빌로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겸허한 자리에 있게 하소서.  인간의 논리나 지식으로 말씀을 받기 보다는 주님의 영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소서.  나의 생활에 충실하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신 주 그리스도를 붙잡게 하소서.  그래서 나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쁨되게 하소서.  이러한 기쁨이 넘치는 교제가 오늘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시며, 주님 앞과 사람 앞에서 어리석은 입은 다무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