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해설에서는 "(사가랴가) 자신이 처한 상황,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했고 의심했습니다. 그 결과 사가랴는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깨달을 수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의를 온전히 추구하는 사람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보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믿음’을 실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해설인데, 매우 도전되는 말씀이다. 하지만 사가랴의 경우 그가 의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처음 겪는 일이고, 다짜고짜 약속부터 하는 천사가 가브리엘이라고 자신을 밝히기 전까지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8절에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라고 한 말은 원어에는 ‘무엇을 근거로 내가 이것을 알게 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인데 과거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는 자신을 밝히고 그 ‘증거’로 말을 못하는 표적을 준다. 이것을 반드시 ‘징계’로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징계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도 침묵은 매우 힘든 고통이지만, 더우기 제사장인 사가랴에게 말을 못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가랴는 자신의 직무를 모두 마친다 (23). 이것이 ‘징계’를 받아도 포기하지 않고 의를 추구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본이다 (물론 자신의 죄로 징계를 받는 문제와는 다를 수 있다. 그럴 때는 직무에서 내려와야 한다).

‘의’로운 사가랴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명의 삶 해설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절대 주권이다. 당시 제사장들이 많았고, 그 중에 오직 스가랴만 ‘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으로 스가랴에게 가브리엘이 보냄 받았고 (19), 또 사가랴의 믿음에 상관없이 침례자 요한은 올 것이며, 사가랴에 임한 침묵의 시간은 ‘이 일이 되는 날까지 (20)’ 라는 기한이 있다.

의롭게 사는 것도, 믿음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의를 추구할 수도,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경외하는 자는 ‘이 일이 되는 날’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안배하심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주님, 뒤돌아 보면 정말 믿음으로 산 적이 거의 없음을 고백합니다. 다만 주님의 은혜가 저를 이끌어 주셨고, 하나님의 섭리가 인도하셨습니다. 믿음 주셔서 의롭게 하신 것도 주님이시고,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마음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단지 침묵함으로 그 때를 기다립니다. 주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영광은 주님이 받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