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주의 나심을 전하자 목자들은 ‘ 가서 보자’라고 서로 얘기했고, ‘빨리 갔고’, ‘찾고’ ‘보고’ ‘전했다’ (15-17).  천사를 통한 주의 말씀에 대해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갔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아직 밤이고 들에는 양들이 있는데 그 양들을 모두 놔두고 갔을까?  그리고 베들레헴이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해도 호적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그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어떻게 찾았을까?  그리고 순서에 마리아를 먼저 적은 것은 누가가 주님의 인성을 중시해서 였을까?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아마도 목자들이 천사가 나타나서 전한 것은 그들로 찾아가서 경배하기를 원한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양들도 주의 능력으로 지켜질 것을 믿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맡은 작은 일에 충성하지만, 그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올 때 과감히 내려놓을 수도 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는 더 이상 양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  그의 부르심에 나아가야 한다.

 

두 번째 의문은 ‘찾다’의 원어를 보면 이해가 된다.  ‘아뉴리스코’ 라는 단어로서, ‘가운데’를 뜻하는 ‘아나’ 라는 단어와 ‘찾다 ( 7:7, ‘추구하면 찾을 것이요’ 에서)’를 의미하는 ‘휴리스코’의 합성어인데, 그냥 어쩌다보니 발견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찾아 다니다 발견한' 것을 의미한다.  목자들은 단지 베들레헴이라는 정보만 있었지, 여관인지 잘 사는 집이었는지 그 외 어떤 다른 정보도 없었다.  하지만 부지런히 묻고 찾아서 결국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배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시고 만나주셔야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부지런히 찾으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사야 55:6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한다.  주께서 하시는 것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

 

21절부터 24절 말씀은 아직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이것에 대해 생명의 삶 해설에서는 ".. 그들은 변함없이 율법에 순종했습니다.  흔히 구약 시대는 율법의 시대고 신약 시대는 은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율법과 은혜는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은혜가 넘쳐 날 수 있고, 은혜 안에도 율법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라고 하는데, ‘율법의 정신’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바로 후의 문장이 좀 걸리는데, ‘성전에서의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과 은혜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고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라고 한다.  과연 어릴 때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율법대로 행해진 것이 ‘아름다운 조화’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잘못하면 마치 은혜 시대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해설로 들린다.  물론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 즉 은혜 시대가 열리기 전, 성전이 아직 존재할 당시에는 ‘십일조’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율법을 어기려고 하는 것 처럼 보이는, 특히 그리도 중히 여겼던 안식일을 범하는 문제로 바리새인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셨던 것은 어떠한가?  ‘돈’ 문제와 ‘안식’ 문제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생명의 삶 해설처럼, ‘율법의 정신’은 필요하다.  특히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죄를 깨닫는 것은 율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 3:20).  물론 양심이 말을 하기도 하지만, 세대가 악해지면 양심도 타락하기 때문에 양심으로만 기준을 삼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율법은 은혜를 경험하게 하지만, 이제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특히 이방인들은 율법에서 온전히 자유함 받았다.  이 문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지만, 특히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동의한 지침은:

 

(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 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라고 결론지었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이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제자들’ 즉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율법에 대해 성경은 단계적으로 말하는데, 복음서의 '폐하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완전케 한다' '굳게 세운다' 그리고 결국 에베소서에는 폐하는 것으로 나온다. 율법을 행하는 것에는 도무지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율법 자체를 성경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 결코 지킬 수도 완성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우리의 무능함을 알게하여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지, 그것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고 선해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결론 짓는다.

 

(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 율법을 완전케 하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즉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했음을 말씀한다.

(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율법 자체는 참되고 선하기 때문이다.

(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율법보다는 믿음에 의한 언약이 먼저임

(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아마도 율법폐기론이라는 말이 문제가 된 것은 구원파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떠한 ‘~론’도 성경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율법폐기론’ 보다는 ‘성령을 따름 ( 4, 5)’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다.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성령이 이 땅에 부어졌고, 성령은 같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을 따름으로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옛 계명은 ‘말라’가 많았지만 새 계명은 ‘하라’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말씀이다.  지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적극적인 행함으로 열매 맺는 것이 목적이다.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동시에 완성되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지만,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 8:4)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 ( 5:16).  우리가 이제 따를 계명은 ‘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요이 1:6).  그리고 이것이 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다.

 

주님, 주의 오심은 분명 좋은 소식인데 나의 삶 가운데 열매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 율법에 비추어 낙담하지 말고, 생명 주시는 주님의 영으로 다시 용기를 내고 힘을 내기 원합니다.  잘못된 것은 자백하며 그 영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 삶 가운데서 좋은 소식이 되소서.  그리고 이 좋은 소식을 접하며 경험하며 전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