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기록에 의해서는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임하지 않으셨다. 그런 가운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희망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더우기 로마의 압제에 대해 어떤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겠지만, 400년 동안 여기 저기 등장했던 민족주의적인 리더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했다.

하지만 그렇게도 긴 시간을 지나는 가운데도 신실하게 ‘구원하시는’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이들 둘을 본다. 이 둘은 ‘기다리고 (25)’ ‘기도하는 (37)’ 사람들이었다. 먼저 시므온은 흥미롭게도 제사장이나 레위인 혹은 선지자 등이라는 언급이 없다. 단지 예루살렘 거민 즉 일반 평민이었는데,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기록한다. 보통 어떤 이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사람’ 혹은 ‘그는’ 이라는 대명사 ‘아우토스’를 쓰지만 여기서는 ‘이 사람’ 즉 ‘안뜨로푸스 후토스’ 라고 했다. 즉 ‘이 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이지만 메시야를 신실하게 기다리는 시므온에 대해 누가는 존대한다. 그는 정말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성령이 ‘충만하다’ 라고 말을 하지만 시므온에게는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 라고 한다(25). ‘위’를 뜻하는 ‘엪’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위’ 즉 함께 섞이는 것 보다는 그냥 위에 있는 것을 대부분 의미하는데, 재미있게도 마 12:18에는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을 인용하며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한 것은 원어에 ‘내 영을 그 위에 놓겠다’ 즉 ‘엪’으로 되어있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능력을 의미하지만, 성령이 그 위에 있는 것은 주권을 나타내고 이는 ‘예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시므온은 29절부터 35절까지의 내용을 선포한다.

28절은 ‘아기를 안고’라고 번역됐지만, 원어에는 ‘그리고 그는 그의 팔들 안으로 그를 (아기 예수) 영접한다’로 되어있다. 단지 아이를 그냥 부모로부터 빼앗아 든 것이 아니라, 두 팔로 그를 ‘영접’했다. 이 ‘영접’이라는 단어는 ‘덱소마이’로 ‘정중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10:40의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에 같은 단어가 쓰였다. 이에 비해 요1:12 ‘영접하는 자’에는 사실 ‘취하다’라는 의미인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뵙고 처음 하는 고백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9)’ 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그의 평생을 통해 메시야 오심을 기다렸음을 알 수 있다. ‘주재’는 원어로 ‘데스포테스’인데 딤전 6:1의 ‘상전’과 같은 말로서 ‘절대적인 주’를 의미한다. 헬라어권에서 ‘쿠리오’가 ‘주’라면 아마도 히브리권에서 절대주권자는 ‘데스포테스’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삶은 데스포테스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다. 그리고 주의 말씀하심은 그에게 평화가 되었다. (영단어 despotism이 아마도 데스포테스에서 온 것일텐데, '전체주의적인 폭정'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라 온전히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는 전능자시다.)

누가는 엘리사벳의 선포와 마리아의 고백과 사가랴의 예언과 천사들의 찬송과 오늘 시므온의 찬송 등 시와 찬송을 충만하게 기록하고 있다. .. 멋진 의사다. 나에게도 복음으로 인해 이런 시와 찬송이 충만하기를!

안나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는 나이 많은 여자 선지자라고 한다. 여자가 선지자가 되는 경우는 드문데, 바로 그 드문 케이스에 해당한다. 여선지자로 불릴 수 있던 이유는 그가 긴 시간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 답게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다 (38). 자신을 선지자로 생각한다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겨야 한다. 그래야 비로서 말해낼 수 있다.

주님, 복음이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선 내가 전심으로 사모하며 기다려온 것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신실하게 고난을 견디며 기다리는 주의 백성들을 주께서 높이시고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주의 인자하심을 맞보며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선지자의 자격이 엄격한 것임을 봅니다. 또 선지자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배웁니다. 복음이 복음되기 위해, 오늘도 주께서 나의 주가 되시며, 주의 백성들에게 온전히 데스포테스 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