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갈등인 죄의 문제 그리고 그 암울함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1절과 2절은 꽤 길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 사정이 별로 좋지 않게 들린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옛 통일 왕국은 물론이고 유대와 이스라엘의 흔적도 아듯하다. 이러한 상황에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통일을 이루지 못한, 아니 갈기갈기 찢겨진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다.
2절의 ‘임한지라’는 원어로 ‘에게네토 (되다)’ 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물론 요한이 말씀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말씀이 (레마) 요한 ‘위에 (에피) 있는 것이 되었다’ 즉 ‘임한 것’이지만, ‘에게네토’를 사용해서 더 극적으로 들린다. 드디어 하나님의 레마가 사람 위에 임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그 많은 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레마가 들리지 않았지만 광야에서 요한에게는 그 말씀이 들린다. 하나님의 하나의 말씀하심이다.
어떠한 말씀이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지만 요한은 그 즉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한다 (3절). 원어에서는 ‘죄들(복수) 사함 안으로의 침례를 선포하다’이다. 주님의 복음이 시작되기 전, 그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의 사역은 ‘죄들 사함을 위한 침례’였다. 여기서 마치 ‘침례’가 죄를 사함, 혹은 용서로 이해될 수 있지만, 침례의 원어는 ‘밥티스마’로 ‘물에 잠김’을 뜻한다. 보통 ‘세례’라는 말에는 ‘씻다’의 의미인 ‘세’가 강조되는데, 원래 ‘밥티스마’의 의미는 죄들을 '씻는' 것이 아니라 그 죄들을 짓게 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 혹은 물에 잠김으로 죽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오직 죽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하다’의 원어 ‘아뻬시스’는 그 원래 의미가 ‘속박에서 놓임 받다’ 로서 ‘죄들에 대해 용서받다’ 혹은 ‘죄과가 도말되다’의 의미로 해석되는데, 그 어원은 ‘아삐에미’로 ‘보내다, 놓아주다’의 의미이다. 즉 죄의 결박에서 놓임 받음을 의미한다.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죽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큰 빚을 지어도 죽으면 거기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압박으로 조여짐을 당할 때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선택보다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 요한이 침례를 시작할 때 요단 강 부근 각처로부터 사람들이 나아왔다.
그런데 육체의 죽음은 많은 것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고 영벌이 있다. 하지만 영적 회개는 영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8절). 사람들이 ‘합당한 열매’를 물어볼 때 요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고 상식적이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11절)’ 즉 욕심 부리지 말고 없는 자들에게 나누라는 말씀이다.
자본주의의 기본은 인간의 욕구 혹은 욕심이 전제한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는 욕심을 무시하고 나눔을 주장한다. 모두 잘못 되었다. 이러한 것에서 회개 즉 ‘생각을 바꿈 혹은 새롭게 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창출하지만 착취하지 않고, 이익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은 ‘회개’없이는 안되고, 동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된다.
세리에 대해, 또 군인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 역시 요한의 반응은 매우 상식적이다. 침례는 죄에서 해방됨을 보여주지만, 죄사함 받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러한 상식적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
백성들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기대에 대해 요한은 확실히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밝힌다. ‘오실 그 분’에 대해 물 침례를 베푸는 자신과 비교하며,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 것’임을 말한다. 물 침례는 우리의 육신을 장사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성령과 불의 침례는 우리의 옛 기질를 태워버리고 주님의 생명의 성령으로 완전히 잠겨지는 침례이다.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사역을 하고 ‘좋은 소식’을 전했지만 (18절), 그 결과는 옥에 갇히는 것이었다. 요한과 비슷하게 보이는 정치적 선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옥에 갇힐 수 있지만, 그 차이는 ‘좋은 소식’을 전하느냐에 있다. 선동가들은 선동만이 목적인가, 아니면 비전을 제시하는가? 아무리 좋게 보이는 비전이라도 거기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선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권력자 헤롯은 요한의 여러 가지 일들과 더불어 특히 자신의 치부인 헤로디아의 일을 폭로한 것에 대한 빌미로 요한을 잡아 가둔다 (20절).
주님, 복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보기 원합니다. 죄의 손아귀에서 온전히 놓임 받아 이제 주님의 능력으로 그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내게 하소서. 주님, 나의 삶에 명하소서.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창 1:11) 하신 것 처럼, 이제 명하소서. 주는 포도나무시고 우리는 주의 뻗어나가는 가지들로서 열매를 내게 하소서. 주여, 요한은 묶여도 그리스도께서는 오십니다. 우리의 현실이 녹록지 않아도 주께서 오심을 믿습니다.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