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은 제한이 없으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입장을 취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온전히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완전히 상대방 같이 되어 봐야 한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23)’ 이라고 말하는데, 원어로는 ‘에노미제토’로서 ‘법적으로’, ‘관습에 의하면’, 혹은 ‘여겨지다’ 등의 의미이다.  왕으로 오심을 말한 마태복음과 섬기는 자로 오심을 전한 마가복음,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계시된 요한복음에 비해 누가복음은 사람의 입장을 고수한다.

 

이것은 그의 족보를 기록한 방법에서도 나타나는데, 첫째로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다르게 거꾸로 올라가고, 둘째로, 아브라함과 아담을 지나 하나님까지 가는데, 이것은 매우 특이한 설명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낳다’라는 단어를 쓰지만, 누가복음 에서는 23절에만 ‘요셉의 아들’이라며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후 부터는 계속 ‘~위는 (헬라어로는 ‘투’, ~)’ 이라고 기록한다.  즉 ‘낳은 문제’가 아니라, ‘법적’인 문제로 다루어진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낳지’ 않으시고 창조하셨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장자권이 주어졌던, 하지만 또한 타락한 존재가 되었다.  아무튼 요셉은 예수님을 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해석은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것이라는 설명인데, 이것은 누가가 의사였던 점을 이해하면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마리아와 요셉 모두 다윗에 이르러는 한 줄기였음을 보는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계보적으로도 또 어떤 면으로 생리학적 혹은 유전학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유일한 ‘모노게네’ 하신 분이다).

 

이러한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21절로 돌아가면 주님께서도 침례를 받으신 기록이 나온다.  더우기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데, 3:14에는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고 기록한다.  죄가 없으신 ( 4:15)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다시 침례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침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 받으신 후 ( 4)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그 전에 2 51절은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기록한다.  이제까지 아들의 입장으로서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들었다면, 침례를 통해 사적인 관계의 묶음에서 벗어나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침례는 옛 것을 끝내고 새 것을 시작하게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힘과 위안이 되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아주 거대한 양같은 특이한 제물을 보내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인간’ 예수로 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오셨기에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셨고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 4:15, 개역한글).  ‘체휼’이 개정역에는 ‘동정’으로 번역됐는데, 원어 ‘숨파떼오’는 단어적으로는 영어의 ‘sympathy’의 어원이라 ‘동정’이 맞지만, 단지 마음으로만 측은히 여긴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동일한 고통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

 

복음을 받았다고 고난이 없지는 않다.  오히려 복음을 인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딤후 1:8).  아직 만물이 회복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3:21).  하지만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볼 때,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을 볼 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또한 볼 수 있고, 이 비밀은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벧전 1:12).

 

주님, 주께서 사람으로 오셨고, 30세까지 부모의 권위 아래 순종하며 받드셨고, 그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더욱 사람의 형편을 깊이 체험하셨음을 봅니다.  인간으로서 받는 시험을 모두 겪으시고 이해하신 주님이시기에 주 앞에 아뢸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주님 위안이 되시고, 어떤 이유의 고난이든지 그 것들을 통해 주를 닮아가도록 승화시켜 주소서.  또한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이들의 입장을 함께 느끼며 동참할 수 있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 성령 충만 주셔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소서.  더욱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