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죄로 인류(人類)는 신류(God kind, 1:26)에서 마귀류 (너희 아비 마귀, 8:44)가 되었다.  그래서 마귀에게 속했고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 (구해서 속함) 혹은 속량이 필요했고,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치르고 다시 사오셨다 (redeem).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사람은 희망도 없고 그를 주인으로 섬겨야 했는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으로서’ 모든 시험을 받으시고 마귀를 이기신 주님에 대해 기록하며 주님께 속함으로 인간도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험 받으신 내용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마가복음은 간단하게 두 줄만으로 요약했다 ( 1:12-13).  마태와 누가가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지만, 순서가 바뀐 것이 눈에 띤다.

 

예전에는 이 내용을 읽으며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기록했음을 염두에 두고 묵상해 보니 그 시험이 간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전에는 40일 금식이 끝난 후 단지 세 번의 시험을 이김으로 주님은 마귀에게 승리하신 것으로 이해했지만, 오늘 보니 그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시험 받거나 유혹을 받는 상황에 들어갈 때, 단 몇 번의 물리침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비슷한 시험은 계속 될 수 있다.

 

2절은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고 기록하기 때문에 마치 40일 후에 배가 고파졌고 그 후에 마귀에게 세번의 시험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1절과 2절을 연결해 보면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금식을 시작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첫 날부터 배고프고 힘들기 마련이다.  주님께서 인간으로서 고난을 통과하시며 시험을 받으셨다면, 소위 ‘40일 금식 기도’ 후에 간단히 세 번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40일 내내 주야로 같은 시험과 같은 유혹 앞에 놓였을 수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물론 ‘날 수가 다하매’ 즉 40일 후에 비로소 주리시고 또 마귀의 시험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지만, 마귀에게 ‘시험받았다’의 동사는 수동태 현재 진행형이다.  40일 후가 아니라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분명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셨고 (1), 영 안에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들어가셨지만, 동시에 마귀에게 시험 받고 계셨다.  성령에 충만하면 마귀에게 시험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령에 충만할 수록 오히려 마귀가 더 시험할 수 있다.

 

1절에는 성령 '충만’이 있지만, 2절에는 ‘주림’이 있다.  이 ‘주림’은 마 5:6의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가난’과 같은 단어, 즉 모자라고 부족한 상태인데, 물론 음식을 먹지 못해서 배고픈 상태를 말하지만, 1절의 ‘충만’과 대조가 되는 단어이다.  즉 주님께서는 40일 금식 후 마지막 날에는 (아마도) 성령 충만의 상태에서 이제는 모자란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령 충만하면 모든 시험에서 다 이기고 승리할 능력을 받지만, 40일 동안 고난을 통과하며 그 충만하심이 고갈되면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의 어떠함 밖에는 없다.  그 때 마귀는 시험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누가복음이 주님의 인성을 기록함에 있어 이런 생각이 든다.) 

 

마귀는 처음에 걸고 넘어지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문제이다.  먹는 것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그 외 여러 시험에서 승리하기 매우 어렵다.  마귀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시오. (우리말 성경)” 라고 말한다.  마귀는 매우 간교해서 이 시험의 의미를 알았다.  그래서 주님의 정체성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과연 이 시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느냐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지금은 돌로 빵을 만들지 않겠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사람’의 위치를 택하신다.  우리를 위하신 시험이기 때문이다.  (원어에는 마태복음 처럼 ‘하나님의 모든 레마로 산다’가 있다.)

 

두 번째 시험으로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5,6,7)’고 말한다.  기본적인 육신의 필요에 대한 시험을 통과하면 혹은 필요가 채워지면 그 다음에는 높아지려는 욕구에 대한 시험이 따라온다.  마태복음은 이 시험을 세 번째로 놓지만 누가복음은 두 번째인데, 아마도 사람으로서 받는 시험은 이 것이 두 번째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높은 곳에 올라가 한 눈에 모든 왕국들의 영광을 보여주는데, 그 모든 왕국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겠다는 제안이다.  그런데 ‘네게 주리라’는 미래형 동사다.  지금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주겠다는 것인데, 그 조건은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누구든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에서 ‘누구든’은 남성형이지만 ‘원하는 자’는 여성형 즉 ‘원하는 그녀’ 이다.  마귀는 정말 간교하다.

 

이 때 마귀는 아마도 휘황찬란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건은 사람으로서 매우 매력적이다.  단지 그에게 절만하면 (예배와 같은 단어) 이 모든 것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은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으로 다시 승리하신다.  원어에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명령이 있는데, 사탄의 이러한 꿀발림 유혹에 대해 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함으로 대적하며 물러가라 명하신다.  영적인 예배(프로스쿠네오)와 섬김(라트루세이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받으신다!  할렐루야 아멘!

 

인간으로서 이러한 높아짐에 대한 유혹에 승리하면 남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관계다.  마귀는 계속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시험하는데, 주님은 ‘기록된 바’로 대응하신다.  그러자 마귀는 마지막 유혹에 대해 그도 ‘기록되었으되’ 라며 시험한다.  성경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마귀가 한 말도 있으며, 하나님 말씀 조차 마귀처럼 이용할 수 있다.  소위 ‘번영 신학’ 설교자 중 하나가 ‘주님께서 죽으실 때 그의 붉은 염색을 한 외투를 병사들이 나누었다. 주님께서도 비싼 붉은 색 옷을 입으셨으니 돈이 많으셨다.  그래서 우리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 라는 설교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마귀의 말이고 마귀의 해석이다.  (물론 믿는 이들이 부자가 되면 안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부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다.)

 

믿음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부딪히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과 환호이고, 여기에는 하나님을 시험해보고 싶은 유혹이 따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이다.  이제까지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번 시험에는 ‘하였으니라’고 답하시는데, 기록된 말씀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이 내게 지금 말씀하심으로 '선포되어질' 때 능력이 된다.  기록된 말씀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이 혼잡해질 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믿음 생활은 묵묵히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하다’는 단어 ‘에크페이라조’는 ‘밖’을 의미하는 ‘에크’와 ‘시험하다’의 듯인 ‘페이라조’의 합성어인데, ‘페이라조’는 앞 구절 ‘마귀에게 시험받다’와 동일어이다.  이 ‘에크페이라조’는 신약에 단 네 번 나오는데, 오늘 말씀과 동일한 마4:7과 눅 10:25에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했던 내용과 더불어 고전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주를 시험’함에 대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은 것을 예로 든다. 

 

이 내용은 민 21:4-6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고 불평했는데, 그래서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  즉 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 뜻대로 해달라고 기대하며 그의 능력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육신의 필요에 대한 시험도 이기고 모든 영광에 대한 유혹에도 승리하지만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관계를 잃는다면 영적으로 죽게 된다.

 

13절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고 하는데, 단지 세 번의 시험이 아니었을 수 있음을 본다.  아마도 비슷한 내용으로 계속해서 여러 가지 시험이 있었겠다.  더우기 이 시험에서 승리했으면 마귀는 더 이상 방해할 것 같지 않지만 ‘얼마 동안 떠’났다고 기록하는데, 원어에는 ‘카이로스까지’ 즉 ‘그 때 까지’ 떠나있었음을 말한다.  ‘그 때’는 아마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의 사역 곳곳에서 계속 시험이 있었을 수도 있다.  사역 중에 수 많은 시험들이 있는 것에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오히려 시험이 아예 없다면 올바른 사역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주님, 사람으로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시고 승리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 시험을 받을 때에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시고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주님의 사람되심을 취한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사역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내 안에서부터 먼저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의 능력에 대해 증명하시라고 감히 떠들던 때도 있었음을 알고 회개합니다.  시험을 받기 전 부터 여러 유혹에 눈이 돌아가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