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15절을 보면 주님께서 시험을 마치시고 성령에 충만하셔서 갈릴리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는데, 처음 사역은 주로 각 지역의 ‘회당’에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성전은 유일하게 예루살렘에만 있었지만, 회당은 각 지역에 존재했었는데, 말 그대로 ‘순아고게<-순아고’ 즉 ‘함께 이끌다’의 의미로 누구든 모여서 말씀을 읽고 가르치던 장소이다.

 

그러다가 고향인 나사렛으로 오셔서 안식일에 해오시던 대로 여기서도 회당을 방문하셨는데, 근대에 지어진 유대인 회당들은 꽤 멋진 극장식 구조로 되어서 무대도 있고 의자들도 가지런히 놓여진, 보통 교회 건물들과 큰 차이가 없게 설계되었지만, 2천 년 전의 각 마을에 있던 회당은 아무래도 그런 구조의 건물이라기 보다는 텅 빈 홀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 모임을 갖던 곳으로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어떻게 모임이 시작되고 또 의식(ritual)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누구든 일어서기만 하면 (16) 그날 준비된, 혹은 그 회당에 마련되어 있던 두루마리 성경이 주어지고, 그 중에 구절을 찾아 읽을 수 있는 형태의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절을 읽은 사람은 여기에 대해 나누고 가르치는 형식이다.

 

이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상상이상으로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는데, 당시 모임에 비해 현재 교회 집회는 비교적 상당히 제한되고 경직되었다는 느낌이다.  물론 누구든 와서 가르치기 시작하면 질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2천 년 전 당시에 이러한 실행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문맥을 보아 주님은 그 회당을 처음 방문했던 때 (아니면 적어도 마지막 방문 후 시간이 꽤 지난 후) 같아 보이는데, 말씀을 마치시자 사람들이 비로서 (지금 보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갈릴리 여러 마을 회당에서는 무슨 성경 구절을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고향 나사렛에 와서는 이사야 두루마리가 주어지자 지금의 61 1-2절 부분을 읽으셨는데, 개정역은 헬라어 원본과 조금 다르다.  한글 킹제임스가 원어에 가까운데, "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심이라.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케 하시며,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짓밟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고 /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고 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생명의 삶 해설처럼 이사야 원본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구약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기록되어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부분은 추가되었고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삭제 되었기 때문이다.

 

로고스이신 주님께서는 구약의 내용을 조금 고치거나 추가할 권위도 있는 것을 보여주신 걸까?  만일 그렇다면 고민거리가 된다.  그런데 사실 신약에서 인용된 구약 내용 중에 추가 되거나 삭제된 것들도 더러 있는 것이 눈에 띤다.  더우기 문맥과는 별로 상관없이 인용된 구절들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점은 요즘 성경해석학 (hermeneutics)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주해해설 (Exegesis) 방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논리와 문맥 비교를 중시하는 그러한 방법 역시 주님의 권위와 성령 앞에서는 인간의 논리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을 마음대로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학문이나 논리 혹은 지식이 ‘성령의 임하심’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눈 먼자를 보게 하’는 문제를 언급하신다.  눈먼 자들이 본다고 하기에 그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었다 ( 9:41).

 

그래서 ‘신학도 안 한 놈들이 감히~’ 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신학한 것 밖에 내세울 것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동시에 성령 충만한 이들도 신학 한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데, 신학도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 하는 것은 성령의 임하심이다.  마음이 없으면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듯이,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신학은 썩은 학문으로 변질되어 논쟁만 일삼는 도구로 전락한다.

 

아무튼 이사야 61장의 내용은 복음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들에게 전파됨을 말한다.  그래서 복음이다.  부자나 자유하다고 생각하는 자, 본다고 여기는 자, 압제자들에게는 복음이 임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아마도 가난하고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들로 여겼을 수 있다.  여러 압제에 눌려 있었기 때문일 것인데,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 

 

여기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언급하는 것인데, 희년은 ‘때’ 즉 크로노스이면서 카이로스이다.  주님의 때가 분명히 오고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인지 기대할 수 있는데, 이 희년이 오면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 등 자신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신다.  ‘응하다’의 원어는 ‘충만하다’ 즉 ‘차다’의 의미인데, 즉 때가 찼다는 말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음을 말씀한 것이다.  (왕국이라는 단어는 여호와 증인 때문에 쓰기를 꺼려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왕국’이다.)

 

역사를 보면 아무리 나라가 적의 손에 넘어가도 왕이나 왕족이 살아 있으면 그 한명으로 다시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왕 자체가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왕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왕국은 임한 것이 된다.  그래서 ‘때가 찼고’ 왕국은 임했으며 복음은 전파된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은혜로운 말’을 들었지만, 주님의 대답에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긍휼를 입은 이방인들의 대표인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을 언급하시자 그들은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났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화나게 했을까?  은혜로운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화를 낸다.  유대인들도 아니고 지방 나사렛 촌사람들인데도 그들은 주님 말씀에 울컥했다.  결국 그들은 교만했고 특권의식으로 가득찼음을 드러낸다.

 

주님, 만물이 회복되는 때는 분명 올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왕국은 주님 오심으로 임한 것을 봅니다.  그 왕국의 지경 안에 살게 하소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며, 내 안의 숨긴 것이 드러날 때, 주 앞에 겸손함으로 나의 어떠함을 자복하고 주의 긍휼을 구하게 하소서.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것을 봅니다.  이 시간 가난한 자들, 압제 당하고 고난을 통과하며 주님을 보기 원하지만 여러 가지 것들로 시야가 가려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빛 비춰주소서.  내 안에서도 더욱 비추시며 내 귀도 열어 주셔서 이미 임하신 주의 말씀을 분명히 듣게 하소서.  주의 때가 충만한 하루 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