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시고 다시 가버나움에 내려오셔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것은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였다. 한글 킹제임스역에서는 ‘능력’으로 번역했는데, 원어는 ‘권위, 엑수시아’ 이다. 개정이 더 맞게 했다.
당시 회당에서 가르치던 이들이 꽤 있었을텐데, 주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은, 물론 주님 당신이 ‘로고스’이시기도 하지만, 아마도 다른 이들의 가르침에는 확신이나 단호함이 없었기 때문이겠다. 진리는 분명하고 확실히 선포되어야 하는데, ‘그럴 것 같다’ ‘~한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가르칠 때 진리는 진리가 되지 못한다. (나도 나눔 중에 ~같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편인데, 좋지는 않은 것 같다 – 또 같다라고 쓰네. ㅎㅎ)
주님의 가르치심에 ‘권위’도 있지만, ‘능력’도 있는데, 36절에는 사람들이 주의 명령에 권위와 능력이 있음을 시인하며 감탄한다. ‘능력’ ‘권위’ ‘힘’ 등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는데, 그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전기의 원리를 통해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배터리는 전기를 흘러 보낼 수 있는데, 배터리의 크기 즉 전류 ‘암페어’는 ‘힘 might’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힘의 능력으로 (엡 6:10)’ 라는 말씀이 있다. 거기에서 흘러보내는 전압 즉 볼트는 ‘능력’으로 볼 수 있고, 이 둘을 곱한 것이 전력 와트로서 ‘권위’로 볼 수 있다. 보통 능력과 권위를 설명할 때 제복을 입은 경찰과 트럭을 들어 설명하는데, 제복입은 경찰은 ‘능력’은 없고 트럭은 능력이 있지만 ‘권위’가 있는 경찰은 트럭을 제압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쉽게 이해가 되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사실 권위와 능력은 보통 함께 가고 이 둘은 모두 하나님께 속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흉내낼 뿐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유독 ‘귀신’이 많이 등장한다. 보통 ‘귀신’하면 영어로 ‘ghost’가 연상되지만, 이는 마치 사람이 죽은 뒤 혼백으로 변한다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아서 헷갈릴 수 있는데, 헬라어로는 ‘다이몬’이며 영어 ‘demon’의 어원이다. 이 ‘다이몬’은 매우 특이한 존재들인데, 육체가 없는 ‘더러운 영’들이며 보통 호수나 바다 등 물이 있는 주변에 자주 등장한다. 구약에도 귀신의 존재를 언급하는 내용이 가끔은 나오지만 복음서에서 특히 많이 기록되었는데, 갑자기 귀신들이 많이 생긴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경륜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구약은 거의 대부분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기록했다. 광야 시대, 사사 시대, 왕국 시대를 거쳐 왕국의 분열, 그리고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다. 거의 대부분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땅에 이스라엘 백성으로 나타난 '왕국'이다. 하지만 신약의 ‘복음’은 ‘하나님 왕국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왕국 (천국)’을 말씀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고 ‘영’ ‘더러운 영’ ‘성령’ ‘사람의 영’ 등을 언급한다. 하나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요 18:36), 복음은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온전히 임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을 말씀하지만, 그 방법은 정치적이나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고 ‘영의 새로운 것 (롬 7:6)’에 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이 ‘다이몬’들에 대해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성경은 이들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이들이 존재하며, 그들 가운데 어떤 연결 혹은 네트워크가 있고 지위가 있으며, 결국 마귀 수하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33-34절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바로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고 고백하는데, 주님을 보자마자 ‘귀신같이’ 알아봤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그들 사이에 연락 체계가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 다른 다이몬들에게 모종의 통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물을 좋아하고 물이 없으면 사람의 몸 혹은 짐승의 몸을 탐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사람이나 동물의 육신에 들어가면 그 몸들을 제어하게 되는데, 돼지떼에게 들어가 바다로 달려들어 몰살하게 한 것, 그리고 여러 귀신 들린 자들에 대한 내용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귀신들과 복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회당의 귀신 들린 자에게서 명하여 떠나게 하신 사건,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을 때 ‘열병’을 꾸짖으셔서 병이 떠난 사건, 귀신들로 인한 병들이 나은 사건 등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것 (43절)과 관계가 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왕국’에 촛점을 맞춘다. 침례자 요한도 그렇지만 주님께서도 처음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마 3:2, 4:17). 그리고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으며, 이는 주님 당신 자신이심을 말해준다.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귀신들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고 (눅 9:1),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사도 바울과 제자들 역시 그 능력을 행했다. 그런데 반면에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마 12:27)’ 라고 하신 것 처럼 바리새인들의 아들들도 귀신들을 쫓아내는 사역을 했던 것 같다. 더우기 타 종교에서도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도 있고 ‘퇴마사’라는 이들도 있다.
행 19:13은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라고 기록하며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 조차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며 귀신을 쫓아내려 하자 오히려 귀신에게 당한 내용이 나온다. 마 7:22의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라는 구절, 눅 9:49의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등의 내용을 보면 믿지 않는 이들 혹은 불법자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음을 본다.
원어를 보면 이 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데, 위의 모든 구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는 ‘토’ 혹은 ‘에피’라는 전치사를 썼다. 즉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혹은 ‘빙자하여 (행 19:13)’ 귀신을 쫓은 것이다. 예수의 이름은 빙자를 해서라도 귀신을 쫓을 수 있는 능력있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복음’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엔 (안)’이라는 전치사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오직 ‘엔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예수의 이름 안에서’이다. 이것은 단지 귀신을 쫓을 때만이 아니라 기도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많은 때 ‘예수의 이름 안에서’ 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한다. 이것은 불법이다.
영어에서는 기도를 끝내고 ‘in the name of Jesus’라고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한다. 이것이 별 문제가 아닐지 모르지만 사실은 매우 심각한 것인데, 우리의 기도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함으로가 아닌, 그 이름 안에서, 즉 그 인격과 생명 안에서, 그의 원하심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복음이 전파되고 능력이 나오며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진다.
우리 말에서 ‘예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합니다’ 라는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영어 조차 자연스러운 표현은 아니다. 더우기 헬라어 역시 누구의 이름 ‘안에서’ 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 단지 그 내용과 정보만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 안에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왕국, 하늘의 왕국이 내게 임한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다.
주님, 주의 이름 안에 있기 원합니다. 주님의 인격과 그 왕국의 지경 안에 있기 원합니다. 내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마음대로 쓰고 빙자하는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주의 인격 안에 있게 하소서. 이 복음이 참으로 복음 되기 위하여, 또 이 복음을 살고 주의 기쁨되기 위해, 오늘도 주의 몸 된 교회에게 권위와 능력 되시며, 각 심령을 새롭게 하시며 주의 이름 안에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