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많은 기록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쉽지 않게 들린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1)'의 말씀은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목회자나 전도자의 길을 가라는 것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명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이것은 복음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동시에 복음은 소위 '자비량 목회'도 가능하게 하는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4:13).

1절은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라고 시작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주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는데, 보통 갈릴리 바다라고 불리는 호수가 여기에는 게네사렛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이름이 마14:34과 막6:53에도 나오지만, 이 둘은 '지명'으로 쓰였는데, 누가복음에는 호수 이름으로 나온다. 게네사렛 땅 즉 갈릴리 호수 서편 유역을 의미한 것으로 보이며, '풍요한 동산'이라는 뜻인데, 출애굽 후 납달리가 받은 땅으로 주님의 주요 사역지였다. 그 땅이 비옥해서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2절은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고 하는데, 이미 조업을 마치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지만 정작 보여야할 물고기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게네사렛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5)'지만 수확은 없었다. 취미로 낚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생업이고 목숨이 달린 문제였지만 허탕치고 만다.

1절에도 '무리'가 등장하지만 3절에도 같은 '무리'가 있는데,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기 전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셨다. 무리는 많은 때 제자가 되지 못하고 무리로 끝나지만, 이러한 무리에게 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따로 떼어 시간을 가지셨다.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신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가 함께 할 만한 큰 배였나?)

'무리'들도 사랑하셨지만 사실 주님의 마음은 시몬을 향하셨다. 4절은 '말씀을 마치시고' 라고 하는데 '마치다'는 말은 '모두 끝내다, 완성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그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신다. 이미 그물을 손질하고 걷었는데, 이런 명령을 하신다. 좀 확대 해석하면 사업이 실패해서 정리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해보라는 권유시다. 그런데 이번에는 '깊은 데로 가'라 하신다. 보통 물고기는 먹이가 많고 수압이 강하지 않은 육지 근처에 많이 서식한다. 깊은 곳에 그들이 원하는 물고기가 있기란 쉽지 않을 뿐더러 깊은 곳에 가려면 노를 한참이나 저어야 하는데, 이미 '밤이 새도록 수고'했던 (5) 시몬에게 다시 힘들게 노를 저어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은 귀찮고 짜증날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말씀을 들으며 졸았을 수도..) 하지만 주님의 '레마'에 순종했다. 결과적으로 그물이 찢어질만큼 물고기가 잡혀서 한 배로 해결할 수 없자 다른 배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했는데 두 배에 모두 가득해서 잠길 정도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시몬 베드로의 반응이다. 처음에는 '선생님' 이라고 주님을 불렀지만 (5), 이제는 '주님'(8)이라고 부른다. '선생님'은 아마도 '랍비'라는 말에 대해 헬라어 '에피스타테스'로 번역한 것 같은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헬라어 호칭으로 '감독'의 의미이다. 주님을 선생으로 대하다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부딪히자 주님은 나에게 ''로 계시 되신다. ''는 말 그대로 '여호와'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시몬은 처음 고백이 '고기가 많이 잡혔으니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데, '죄인'으로 고백한 단어는 '아네르 하말톨로스'이다. '아네르' '남자'를 의미하고 '하말톨로스' '죄인' 혹은 '죄에 빠진, 죄로 짜여진'이라는 뜻인데, 그냥 '죄인'이 아니라 영어 성경처럼 sinful, 죄로 똘똘 뭉쳤다는 고백이다.

단지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경험했지만 시몬은 자신의 죄로 뭉친 실존과 주의 주 되심을 고백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자신을 떠나달라고 아뢴다. 이것이 주를 온전히 만난 사람의 반응이다. 복음을 접한 이들의 태도이며 죄로 마음 아파 하지만 주를 경외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사업을 접으려고 했다가 (이 말씀을 가지고) 한번 더 시도하자 대박이 나더라도 이러한 반응을 보이기란 쉽지 않다. 삶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번번이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주의 거룩하심을 경험한 이들이 보이는 응답이다.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는데 (10), 주님은 '떠나지'도 않고 사명을 주신다. '취하다'라는 동사는 '조그레오'로 생명을 뜻하는 '조온' '사냥하다'는 의미인 '아그류오'의 합성어 즉 말 그대로 하면 '생명을 산 채로 잡다'라는 의미이다. 신약에서 딤후 2:26과 더불어 두 번만 등장하는 단어인데, 딤후에서는 '마귀의 올무'라고 번역했다. 복음은 사람을 사탕발림으로 속여 '낚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잡고 취하는 것이 있다. 복음으로 '사냥'하지 않으면 이미 마귀에게 사냥 당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만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이제 그들이 버린 배와 그물을 교회라는 새로운 배와 주님과 형제들과의 관계라는 새로운 그물로 엮여 생명들을 취하게 된다.

주님, 일반적인 삶을 사는 형제들에게 베드로의 반응이란 쉽지 않지만, 죄로 가득함을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본 것, 그가 경험했던 것을 우리도 경험하게 하시고, 일상을 살지만, 그 가운데 버리고 떠날 것, 내려 놓을 것을 내려 놓는 반응을 하기 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신 교회와 형제들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들을 취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