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부르시자 레위 혹은 마태 역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른다. 마태를 부르신 것도 그가 일하고 있던 현장이었는데,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카탈레이포 - 카타+ㄹ레이포, 내려 놓다) 주님을 따른다. 이것은 상식을 좀 벗어난 사건 같아 보이는데, 주님의 부르심이 항상 상식적이고 논리적일 수는 없다. 마태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자 주님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방하는데,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대답하신 것을 보면 마태가 선한 인물이 아니라 세리로서 그 역시 죄인이었음을 인정하시고, 그런 마태라도 제자를 삼으신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르시자 마태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을 보면, 주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임을 본다. 마태가 얼마나 정직하게 세금을 거두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세리 일로 얻은 부로 큰 잔치를 베풀었을텐데, 주님은 이에 대해 '불의한 재물로 잔치를 열지 말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가지셨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님께서 온전히 시험에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먹고 마시는 시간은 주님에게 전도의 기회였다.
교회는 분명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부름받아 나온 이들의 모임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배타적인 형태로 변할 수 있는데, 물론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은 거룩한 예식이기에 아무나 참여할 수는 없지만, 죄인들을 구원하는 교회의 근본 목적 중 하나를 잊어버리고 이미 구원받은 이들로만 계속 나간다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장은 불가능하고 퇴보할 수 밖에 없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 라는 구호는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지금도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죄인이나 자칭 의인이나 혹은 여러 사회 계층 혹은 인종이나 그 외 다른 배경의 사람들에게도 전혀 차별이 없이 모두에게 열려있다 (롬 3:22). 특히 복음은 죄인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이 전해지면 죄인들은 결코 계속해서 죄인으로 남을 수 없다. 복음은 살인자나 강도나 음행자나 동성연애자들이나 사기꾼이나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지만, 이들이 복음을 온전히 받으면 더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다. 복음은 '회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신다. 어떻게 저런 인간을 사랑하실 수 있나? 하는 질문이 들정도로 그 어떤 이들도 모두 사랑하신다. 그래서 아들 하나님이 오셨다. 하지만 그렇게 놀랄만한 사랑을 주셨기에 그 아들 하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이 복음은 그들에게 저주가 되고 (마 25:41,고전 16:22, 갈 1:9) '거치는 돌 (바위, 롬 9:33)'이 된다.
복음은 종교적 실행에 대한 본질도 돌아보게 하는데, 금식이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종교적인 관습으로 변해 버리면 단지 식사만 건너 뛰는 '굶식'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주님은 금식에 대해 복음서에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고, 이사야서 58:6은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금식의 적극성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해방을 가져오시는 주체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때 이미 금식은 필요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물론 주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했었고 금식은 기본적인 것이라는 것도 말씀하셨다 (마 6:16-17).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에 대한 비유도 말씀하시는데,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묵은 것을 선호한다 (39절). 현상 유지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복음은 '새 것'을 가져오는데, 이 '새 것'에 대해 오해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는 말씀이 마치 악기도 새로운 것을 구입하고 음악도 새로운 유형의 것으로 적용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 좀 더 '현대적'이고 세련되며 화려한 것을 추구하기도 하며 더우기 요즘은 교회에서 '랩'으로 찬양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새 것'이 무엇인지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오는 폐단이다.
'묵은 것 (팔라이오스)'은 말 그대로 오래 된 것을 의미하는데, 낡아서 쓰지 못하는,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새 것 (카이노스)'은 최근에 만들어진, 신선한, 한번도 쓰지 않은 등의 의미로서 시간상으로도 새롭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전에는 없었던' '평범하지 않은' '들어보지 않은' 등의 의미로 크로노스를 넘어 카이로스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클라식 음악은 오래된 것이지만, 지금 연주를 하면 새로운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반면에 아무리 새롭게 보이는 것도 그 내용이 참신하지 않으면 식상한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제일 오래 되셨지만, 오히려 항상 새로우시다. 복음이 바로 그렇다. 복음은 새로운 생명을 계속해서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복음을 기존의 것에 맞추려 할 때 항상 마찰이 있고 서로 융합될 수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새로운 음악 장르가 나온다 해도 그 자체에 주님의 어떠함이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복음과는 조화될 수 없고 오히려 서로가 해를 가져온다.
재미있는 것은 주님께서 '둘 다 보전'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마 9:17에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둘이 다 보전'됨을 말씀하고, 38절 역시 원어에는 둘 다 보전됨을 말씀한다. 왜 주님께서는 묵은 것, 즉 유대교나 율법에 대해 폐기를 선포하지 않으시고 '둘이 다 보전'됨을 말씀하셨을까? 주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시고 그 요구를 끝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에 대해서 로마서 7:6은 '영의 새로운 (카이노테스, 카이노스에서 파생) 것으로 섬'김이 우선함을 분명히 한다. 옛날 찬송가를 부르거나 랩으로 노래를 하거나 그 안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김'이 없다면 그것은 카이로스적으로는 묵은 것이고 복음의 실행은 아니다.
주님, 복음은 나에게 이 시간 회개를 요구하심을 봅니다. 회개할 때 영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기에 복음은 나에게 복음으로 경험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무엇보다 새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