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많은 나라들의 물부족 때문에 여자들이 매일 2-3시간을 걸어 물 길어 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어느 선교 단체가 마을 가까이 우물을 파 주었다. 주민들은 너무 기뻐했고 물부족에서 해결되는 듯 했는데, 어느 순간 그 우물은 막혀 버리고 여자들은 다시 몇 시간씩 걸어서 물을 길어오는 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그 우물은 마을 여자들이 막아 버린 것이었는데, 전에는 몇 시간씩 걸으며 몸은 고생했지만 서로 수다도 떨고 집에서 받은 여러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이제 물이 가까이 있자 집안 일이 더 많아지고 남편들은 여러 가지 것들로 닥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안식의 부재는 우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기록했는데, 먼저 안식일에 제자들이 남의 밀밭 사이를 가며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제자들의 그러한 행위 자체는 율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은 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주님은 이상하게 '안식일'에 대해 변명하지 않으시고 '먹는 문제'로 답하신다. 물론 보통 진설병이 놓인 것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레 24:8) 다윗과 그 일행이 진설병을 먹은 것이 안식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출 25:30에는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고 말씀하며, 진설병이 단지 안식일만 아니라 항상 있어야 함을 말씀한다. 다윗과 그의 일행이 진설병을 먹은 날도 안식일이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주님의 대답의 의미는 무엇일까? 안식일은 원래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보다 '완성'의 의미이다. 완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그래서 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창조 사역의 완전함을 인정하며 그의 백성들이 '영원히 지킬 규례'였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는 버리고, 단지 종교적인 규율로서 '일하지 않는 날' 로서만 와전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 5:17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한다. 원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지만, 사람의 범죄함으로 일이 다시 시작됐는데, 바로 '사람의 아들'로서 구속 사역, 구원 사역, 회복의 일이다.
'하나님이 남자를 만들고 쉬셨지만 여자를 만든 후에는 쉬지 못하셨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인간의 범죄함으로 진정한 안식은 더 이상 일곱 째 날에 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기를 힘쓸' 어떤 것이 되었다 (히 4:11). 안식일에 대해 먹는 것으로 답변한 주님은, 원래 안식을 잃은 원인이 '먹는 문제'에서 였음을 상기시키신다. 1절의 원어에는 '첫번째 안식일을 후 두번째 안식일에' 라는 구절이 있는데, 첫번째 안식일에는 하나님도 안식하셨고 인간도 안식했지만, 두번째 안식일에는 하나님도 인간도 안식을 잃었다. 그래서 이 두번째 안식일에는 먹을 것이 풍부한 '밀밭 사이'로 다니지만, 정작 '손으로 비벼 먹는' 정도로 그쳐야 하는 궁핍함이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윗과 일행의 일을 말씀하며 '그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에도 주이다 (5절 원어)' 라고 결론 지으신다. 주님은 항상 주인이시고, 안식일에도 주인이시다. 이는 오직 주님으로만 '완성'과 '안식'이 가능함을 말씀한다.
6절은 '또 다른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인데,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다. 왜 하필이면 '오른 손'일까? 보통 손은 '일'을 위한 것이고, 더우기 '오른 손'은 '힘'을 의미하는 중요한 손이다. 그런데 이러한 손이 마른 사람은 안식일이건 아니건 일을 할 수 없다. 그에게는 안식일이던 아니던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손을 고치심으로 그에게 안식에 의미가 생기게 하셨다. 그 어느 것에서도 '완성'을 바라볼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 '오른 손'을 회복시키심으로 완성을 위해 일하게 하신다. 주님의 관심은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 등에 있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고발'이라는 말은 '비난'이라는 의미도 있다. 성한 손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일'은 다른 이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이들은 손이 나은 사건에 대해 기뻐하기는 커녕 '노기가 가득'했는데 (11절), 원어로는 '아노이아'로 '아님'을 뜻하는 '아'와 '생각을 의미하는 '노이아'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이해함이 없는', 혹은 '노를 발하는'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들은 생각에서부터 결코 안식할 수 없는 인생들이었다.
주님, 주님을 만난 날이 바로 안식일이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이 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압니다. 이 땅에는 안식이 없고, 편안함을 추구해도 결국은 더 바빠지지만, 주님의 구속 사역은 완전하시며 우리를 온전히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고백합니다. 그 어떤 날도 주인되신 주님께서 안식일에도 역시 주인이시며, 오늘 화요일에도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생각을 바꿈으로 변화되어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