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밤새도록 소위 ‘철야기도’를 하시는데, 문맥으로 보아 아마도 제자들을 세우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 같다. 보통 우리가 하는 ‘철야기도’는 몇 시간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드는데,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를 하셨다. 밤을 새워 기도하는 것 자체도 힘든 것이지만, 그 다음 날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 쉬는 것도 필요한데, 주님은 밤새도록 기도하시다 낮이 되자 제자들 열둘을 따로 세우시며 ‘사도 (보냄받다)’라고 칭하신다. 그래서 이 열두 제자 ‘사도들’은 주님에 의해 보냄 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주님 자신을 대표하고 그 동일한 권위도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몸으로 보여 주신다.
재미있는 것은 14-16절 제자들의 이름 순서가 사도행전과는 조금 차이를 보인다. 같은 저자인데도 행1:13에서는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라고 누가는 기록하며, 순서를 조금 다르게 했고, 물론 가룟 출신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죽었기에 더 이상은 없다. 아마도 사역을 하면서 동역자들이 조금씩 바뀌었나보다.
그런데 전에 그냥 지나치던 이름이 눈에 띠는데, 바로 ‘셀롯이라는 시몬’이다. ‘셀롯’은 영단어 zealot의 어원인데, 생명의 삶 해설처럼 ‘열심당원’ ‘열광자’라는 뜻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추구하는 유대 민족주의자 집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 다니고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셀롯’ 시몬은 아직도 사도고 제자이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셀롯’으로 기록된다. 계 21:14에는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면서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고 기록하는데, 이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은 어떤 이름들이 될까? 새로 뽑은 맛디아가 (행 1:26) 포함될까, 아니면 사도 바울의 이름이 포함될까? 그리고 ‘셀롯인 시몬’은 계속해서 ‘셀롯’으로 불려질까? 흥미롭다.
묵상해보니, 마태가 자신을 계속 ‘세리’라고 불렀던 것 처럼, ‘셀롯’ 시몬은 시몬 베드로와 구분하기 위해 셀롯이라는 별명을 썼을 수도 있지만, ‘정치’와 ‘민족주의’에 열광했던 과거에서 이제는 ‘주님’에 대한 ‘열광자’ 혹은 ‘광신자 (좋은 의미에서)’로 변함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별명이라도 내적인 변화를 통해 그 목적과 주체가 달라지면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다.
이후 주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치셨는데, 사람들은 주님을 ‘만지려고 힘’썼다. 주님을 만질 때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했기 때문이다 (19절). 주님이 직접 손을 내밀어 만져서 병을 고치실 때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마 8:17)’ 라는 말씀 처럼, 주님께서 연약함과 병을 가져가졌지만, 사람들이 주님을 만짐으로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갈 때는 주님의 큰 능력이 그들을 온전케 했다. 그래서 요일 1:1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라고 기록한다. 주님은 사람들이 만질 수 있었고, 만질 때 능력을 경험했다.
20-27절은 ‘4복 4화’를 말씀하시는데, 마태복음의 소위 ‘8복’은 ‘산’에서 선포되지만, 누가복음의 ‘4복4화’는 ‘평지에서 (17절)’ 선포된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마태복음은 이 땅을 초월한 하늘 왕국의 면모를 보여준다면, 누가복음은 역시 인간 세계인 ‘평지’에 대한 것이기에 ‘복’만 있지 않고 ‘화’도 있다. 그런데 ‘복’은 사실 모두 현재에는 ‘고통’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약속은 ‘미래’이다. 하지만 ‘복’ 혹은 ‘행복’보다 더 강한 ‘기뻐함 (23절)’이 있는데, 23절 원어는 ‘그 날 안에서 기뻐하고 있으라 (현재 진행형) 그리고 뛰어라 (아오리스트) 보라 (아오리스트) 하늘 안에서 너희 보상이 큼이라…’ 로 되어 있다. 즉 ‘그 날’은 미래지만, 그 날 ‘안에서’, 그 날을 바라보며, 미래를 이미 현실에서 살며 지금 기뻐해야 함을 말씀한다.
그와는 반대로 ‘화’는 ‘이제까지’ 혹은 ‘지금’ 잘나가는 이들에 대한 ‘미래’의 경고다. 재미있는 것은 26절에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는데, ‘모든 사람’과 ‘칭찬’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아야 하지만 동시에 '거룩함'도 좇아야 한다 (히 12:14). 거룩함과 진리를 버리면서 까지 모든 이들의 비유에 맞출 수는 없다. 그래서 소위 ‘political correctness’가 문제가 많은 것이다. 더우기 사람들의 비유만 맞추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구하는데, ‘칭찬’이라는 말은 ‘칼로스 (좋다, 탁월하다)’와 ‘에이포신 (말하다)’이라는 단어들인데, 이 ‘칼로스’는 사실 많은 때 주님 자신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화 있는’ 사람들은 ‘칼로스’로 보임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신들을 ‘영적’으로 포장함으로 모든 이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이들이다.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다!
주님, 주님의 말씀은 정말 높고 깊고 넓습니다. 하지만 ‘평지’에 사는 우리들에게 임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나로 변화된 정체성을 가져오며 또한 미래의 언약 안에서 현재를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남들의 비유에 맞추기 보다는 주님 말씀 안에서 열심히 주를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