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구절들이 전에는 지켜야 할 계명으로 들렸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씀들에 대해 내가 지킴과 행함을 요구받는 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수혜자였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구절들이 모두 복음이 된다.
27절에 주님은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라고 시작하신다. ‘듣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우선 간접적인 혹은 잘 들으면 직접적인 수혜자가 됨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주님은 ‘너희가 듣느냐? 내가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하라고 말하지만, 내가 지금 너에게 하는 것이고, 내가 이제까지 내 백성에게 해 온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원수’의 헬라어는 ‘에크뜨로스’인데, ‘싫어하다, 혐오하다, 적대시 하다’를 의미하는 ‘에크또’에서 왔다. ‘적’ 혹은 내가 ‘혐오하는 이들’을 ‘아가페’ 하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이 ‘아가페’는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천적 사랑이다. 적들이나 혹은 내가 개인적으로 혐오하고 싫어하며 같이 있기 불편한 이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원수를 아가페 함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 (롬 5:10)’을 상기시키신다. 아가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희생’이다 (살전 1:3 ‘수고’는 ‘희생’의 의미가 있음).
요즘 이슬람 테러 혹은 난민 유입 등에 대한 우려가 있고, 이는 현실적으로 납득이 가는 문제이며 쉽게 다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수를 아가페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여러 행정을 초월하여 그들과 우리를 섞이게 하실 것이다. 전체 기독교인들은 적은 수가 아닐지 몰라도 참된 그리스도인 혹은 제자들은 수가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원수들’에 대해 아가페하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주님의 사랑을 묵상해야 하는데, 27-28절을 수혜자의 입장에서 읽어본다.
원수된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 하고 속에는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던 저를 선대하셨습니다. 생활의 실패에 대해 불평하며 하나님을 탓했던 저에게 복을 주시고 복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먹은 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내 안에서 충만하게 실현될 때, 29절 이하 말씀은 나에게 부담이 아니라 지킬 수 있는 말씀이 된다. 아.. 정말 나의 생각은 변화되어야 한다..
35절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삶을 살 때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는데,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자녀’ 즉 아이들이 되지만, 주님의 생명을 계속적으로 공급 받음으로 이러한 아가페를 실행함으로 성장하면 ‘아들’이 된다. ‘상’에 대해 먼저 말씀하고 ‘아들 될 것’을 말씀하는데, 사실 이 ‘보상’은 ‘아들 됨’과 연관이 있다. 보상은 일에 대한 댓가이고, 아들은 성장과 성숙에 관계가 있지만, 아들이 되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전자전’ 즉 36절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이 이 온다.
살다보면 비판해야 할 일도 생기고 진리에 비추어 정죄할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나의 기준에 맞추어 하고 싶은 충동은 금해야 한다. 그래서 비판하고 싶어도, 정죄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데, 참고 돌아보면 후에는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많은 것들이 아버지에게서 오지 않고 나의 깊이 숨은 어떤 것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극적인 면에서는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두가지가 있고, 적극적으로도 해야할 두 가지가 있는데, ‘용서’하고 또 ‘주어야’ 하는 것이다.
‘용서하다’는 단어는 ‘놓아주다, 해방시키다’를 의미하는데, 용서는 마음으로 붙잡아두지 않고 놓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 ‘아폴루오’는 ‘아포’와 ‘ㄹ루오’의 합성어인데, ‘ㄹ루오’는 ‘풀다’의 의미다. 결혼의 ‘결’이 ‘묶다, 맺다’의 의미라면, ‘이혼’의 ‘이’는 ‘떠나다’를 의미하는데, 바로 ‘아폴루오’가 ‘이혼’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번 이혼하면 더 이상 관계가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바로 그것이 온전한 용서임을 말해준다.
‘주라’는 명령은 ‘용서하라’와 같이 현재진행형인데, 용서도 계속해서 지금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주는 것도 한번이 아니라 계속 해서 주고 있어야 함을 말씀한다. 풀어야 할 것도 계속해서 있고, 또 주어야 할 것 역시 계속해서 있다. 삶에는 계속 문제에 부딪히고, 또 주님의 공급하심 역시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도 놓임을 받는데, 먼저 우리가 용서를 받았지만, 그에 따라 우리가 또한 용서를 실행하면, 법적인 놓임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놓임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주고 있으면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용서에는 그 양과 한계에 대해 ‘같을 것’을 말씀하지만, 주는 문제에 대해서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무엇이든, 그 양이 어떠하든) 줄 때, 우리에게도 주는데, 이 주는 이들은 원어에서는 주님이 아니라 ‘그들’이다. 만일 주님이 주신다면 그래도 믿고 기대하겠지만, 과연 ‘그들’이 줄까? 거기에 정말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 줄까? 그리고 그 보다 내가 정말 줄 것이 있을까? 그건 우선 줘 본 사람이 경험할 것이다. 내가 줄 때, 그 받는 사랑과 배풂은 내 기대 이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후히 되어’라는 말이 원어로 ‘이상적인 되(measure)’인데, 38절은 앞 부분을 말씀하고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한다. 이 ‘헤아림’ 역시 ‘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 ‘메트로’를 썼다. 즉 이것은 우리가 ‘이상적인 됫박’으로 받기 위해서는 ‘같은 (원어) measure’을 써야함을 말씀한다. 내가 한 됫박 정도를 베풀었을 때, 10됫박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됫박의 크기는 같을지라도, 받는 것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나에게 안겨’ 받는다. 그래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행 20:35). 혹시 그들이 주지 않을지라도 아버지께서 갚으시기 때문이다 (마 6:4).
주님, 복음은 이미 나에게 임하여 진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데, 저는 많은 때에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그 생명과 그 공급하심을 묵상하며 오늘도 주게 하시고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욕심과 작별하며 이혼하게 하소서. 복음으로 부요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