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절부터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39절은 ‘그들에게’ 즉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7 1절은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라고 기록한다.  39절부터의 말씀은 제자들은 물론이지만 함께 모였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맹인’ ‘들보’ 등을 말씀하시며 ‘외식하는 자여 (후포크리타)’ 라고 부르시는데  41-42절은 모두 2인칭 단수격이다.  제자들 모두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것도, 함께 했던 백성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누가는 지금 이 부분을 기록하며, 읽고 있는 이들 각자에게 질문하고 있다.

 

나는 맹인인가?  위선자인가?  많은 때 내 생각이 다르고, 나눔이 다르며, 바람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위선자 맞다.  그래서 복음이 나에게 복음이 된다.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나에게는 복음이 필요없다.  복음은 못된 나무에게 좋은 열매를 요구하지 않는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가시나무나 찔레라는 자신을 십자가로 인도하고 무화과 혹은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게 한다.  그래서 내 안에는 아직도 끝내지 못한 것으로 인해 어둠과 슬픔과 아픔과 찌름과 찔림이 존재한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그 행함으로 선해지고 악해진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기에 그 마음에 선을 쌓고, 악한 이도 원래 악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악을 쌓는 것이다.

 

43절의 ‘못된’이라고 번역된 단어 ‘스프론’은 원래 ‘썩은’ 혹은 ‘타락한’을 의미한다.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그 아무 것도 좋은 것이 나올 수 없고 단지 '타락'의 열매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를 읽으면 너무 소망이 없고 부정적이다.  거기에다 48-49절은 ‘행함’을 말씀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위선적인 나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은 47절이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며 48절에는 잘 지은 집은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말씀에 순종함을 의미한다.  순종할 때 마다 더 깊이 파는 것이고, 또 반석이신 주님께 순종함은 나에게 반석이 된다. 

 

그런데 주님은 ‘행함’에 앞서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는 것이 먼저임을 말씀한다.  이것 없이 ‘행’하려고만 한다면 실패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또 순종이 없음을 알았을 때, 먼저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원어에서 여기의 ‘말씀’은 ‘로고스’이며 복수형이다.  문맥상 레마일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로고스이고 더우기 복수이다.  주님께 순종하려면 성경 어느 한 구절 말씀을 받는 것도 좋지만, 사실 순종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주님의 말씀들을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아와, 또 계속해서 말씀들을 들으며, 또 계속해서 그 말씀들을 적용해야 한다.

 

주님, 말씀을 배워도 순간 순간 적용이 쉽지 않고, 나의 못된 기질이 나오고 또 그것을 고집합니다.  어떤 경우에 정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가 의심도 듭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붙잡고 소망을 품습니다.  삶에서 겪는 실패는 당연함을 고백합니다.  다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주님 앞에 나아와 주의 말씀들을 듣기 원합니다.  힘과 생명을 얻기 원합니다.